케이트

책보따리 2015. 9. 9. 22:41

지은이 이름이 케이트인 책의 작업을 마치고, 곧이어 케이트가 등장하는 소설을 번역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장편소설엔 원래 등장인물이 워낙 많고, 영미권에서 케이트는 흔하디 흔한 이름이니 요즘 애들 이름으로 치자면 작명 순위 1위라는 '서연' 쯤 되려나? 아니지, 작가 이름으로도 익숙해야하니깐 뭐가 좋을까.. '희경'? (언뜻 은희경, 노희경 정도가 생각난다)


독자로 치면 은희경의 수필집을 읽고 나서, 다음 책을 집어들었는데 마침 그 거기 '희경'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할 확률은 과연...? 하기야 폴 콜린스의 책을 읽었는데,우연히 곧이어 읽은 다음 책에 폴이란 주인공이 등장하는 사태는 단편집의 경우 별로 어렵지 않을 것도 같다. 다만 내가 요새 하도 책을 드물게 읽으니 직접 경험을 못해서 그렇지. 


이번에 책을 번역하면서 알게 된 건데, 가계에 쌍둥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집안에도 쌍둥이가 태어날 확률은 놀랍게도 80명 당 1명꼴이란다. 그 정도면 엄청난 확률 아닌가!? 길 가다가 날아가는 새의 똥에 맞을 확률도 저거보다는 낮을 것 같은데, 난 그런 적 있을 뿐이고! ㅠ.ㅠ 갈매기 드글거리는 바닷가도 아니고 종로 한복판에서... 암튼 우연의 일치는 생각보다 일상에서 꽤 큰 확률로 다가오는 게 맞다고 봐야 합리적일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 어디 그런가. 선택적인 기억력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또는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짜깁기해서 뭔가 맥락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행운과불운을 점치고... 


째뜬 이번 케이트 아무개가 쓴 책과 케이트 아무개가 등장하는 소설을 연이어 번역하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돌파리 점쟁이의 점괘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겠거니 싶으면서도 종종 일과 관련해선 뭔가 보이지 않는 끈이랄지 운명의 힘 같은 게 정말 있나, 의아할 때가 있다. 아 그냥 교묘한 우연의 일치라니깐! 하고 넘기면서도 혹시 몰라... 그런 기분? ^^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미술관 전시실 벽에서 난생처음 들어보는 근대 유럽 미술사조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 이런 표정으로 뭥미; 싶어서 한참을 읽어도 결국 모르겠다 중얼거리며 걸어나왔는데, 한달도 못 돼서 바로 다음 계약 책에 그 미술 사조가 떡하니 등장해 역주를 다느라 좀 더 알아봐야 한다든지... (워낙 무식해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걸지도)


작년엔 실존 인물이었던 은행강도 선댄스 키드 이야기가 등장한 책 때문에, 역주 한줄 멋지게 달겠다는 욕심으로 당시 상황과 <내일을 향해 쏴라>로 영화화 된 과정을 위키피디아와 구글로 한참 검색했는데, 동생놈이 무슨 다큐 작품으로 받게 된 부상이 하필 <선댄스 영화제> 초청이라는 소식이 곧 날아들질 않나, 심지어 몇달이 지나 동생이 선댄스 영화제 보러 비행기타고 떠난 날, 굳이 그 책의 증정본이 택배로 도착할 건 또 뭐람. 소름끼치게스리...


하기야 이번에 끝낸 책은 시리즈라서 전권부터 따지면 케이트가 나오는 소설을 번역했는데 다음에 계약한 책은 하필 케이트가 저자였고, 그 다음 책에 또 다시 케이트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셈이다. ㅋㅋ 나만 재미있나? 


어랏 신기하네, 결국 이게 천직인가 싶었던 경험은 그밖에도 더러 있었는데 기록을 해두지 않았더니 거의 다 까먹었다. 어쩌면 자꾸만 자존감도 떨어지고 연봉도 부가가치도 형편없이 낮은 이 일에 자꾸 회의가 드는데 딱히 더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달리 방법도 없으니, 무언가 비논리적인 의미부여라도 하려는 심리 탓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괜히 유별나게 기억해 연결 짓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같은 일을 20년째 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 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맥빠지고 (과연 출판업과 번역가로서의 전망은 계속 어케되는 거냐규~??) 지칠 때, 다시 슬슬 곁눈질을 하고 싶어질 때 일종의 채찍질로 괜한 운명론을 들먹이는 것이든, 정말로 교묘한 인연의 실마리가 내 삶을 관통하는 것이든... 사실 상관은 없는 것 같다. 태어나서 글을 깨친 이후로, 독서가 지루한 적 없는 사람으로서 책에 기대어 밥벌이를 한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번역하기에 아무리 한심하고 하품나는 책이라도, 직장에서 발전소 연소기기 매뉴얼이나 계약서 번역하느라 끙끙대는 것보다야 훨씬 재미난 법! ㅋ 언젠가 출판과 종이책이 완전 사양길로 접어든다고 하더라도 내 생전에는 아직 그런 날이 없을 거라 믿고 또 달려보는 수밖에.(한 십년 더? ㅋㅋ)   


제목을 케이트로 정했더니 문득 내가 번역한 책들 중에서 케이트(캐서린 포함!)란 이름은 저자로, 등장인물로 얼마나 자주 나왔는지 통계 내보고싶어졌다. 아 정말 별게 다 궁금..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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