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웃

투덜일기 2015. 5. 29. 01:27

엄마네 집쪽 아래층에서 6,7년쯤 살던 주류 도매상 아저씨네(한때 몸집 거대한 잡종 진돗개 '곰돌이'를 키우며 온 동네를 괴롭게 했던;;)가 얼마 전 이사를 가고, 집주인이 다시 이사를 올거라며 수리를 한참 하더니만 결국엔 또 세를 놓은 모양이었다. 아래층 집주인이 워낙 괴팍하고 싸움도 욕도 잘해서 온 동네에 죄다 인심을 잃은 '장로님'이시라 엄마는 그 아저씨가 다시 이사온다는 소식에 지레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떡하니 이삿짐 트럭이 도착한 날 전혀 다른 사람이 인사를 하자 퍽이나 놀랐다고 했다. 


듣자하니 이전 세입자와 금전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어서 다른 세입자를 들이는 게 일종의 비밀이었다나 뭐라나. 암튼 우리로선 천만다행이었다. 다가구주택임에도 오래된 집이라 주차공간은 한대밖에 없어서 그 아저씨 이사오면 주차 문제로 싸우기 싫어서라도 내가 차를 골목에 대야지 그러고 있었는데 오예~! ㅋㅋ 게다가 새로 이사온 아래층 아줌마는 노상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다가 콧노래를 부르며 마당에 빨래를 널면서 벌써부터 울 엄마와 서로 좋은 인상을 주고받은 모양이었다. 이사 후 두번째 마주쳤을 때 이미 차 마시러 좀 들어오세요~ 그랬다나. 오지랖 넓은 할머니이긴 해도 선뜻 응하기 뭣해서 엄마는 일단 사양을 했다는데, 그간 몇번 얼굴 마주친 거 치고는 놀랍게도 신상명세를 벌써 다 파악해오셨다. +_+ 하기야 울 엄마도 우리 모녀 신상을 대충은 다 공개한 듯, 며칠 전 외출하는데 오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마당에서 반갑게 인사를 하며, "어머니 인상이 참 좋으세요. 좋은 분이랑 이웃되서 반가워요."라고 말했다. @.,@


나는 당황해서 우물쭈물 뭐라고 대꾸했는지 기억도 잘 안난다. 암튼 엄마가 '캐내온' 아래층 이웃의 정보는 남편이 영국인이고 다 큰 아들이 하나 있는데 다른 집에서 살면서 가끔 들른다는 것. 그리고 이사온지 얼마 안 돼 영국에 보름간 다녀오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울 엄마가 마당 화분 몇개와 스티로폼 통에 상추와 고추 모종을 사다 심어놓고 매일 물을 주는 걸 보면서, 부러워서 자기도 그 옆 화분에 상추랑 치커리 따위를 심었다고 했단다. 집 빈 동안에 아들이 다녀갈 수도 있으니 놀라지는 마시라고. 


새 이웃이 영국에 간 사이 울 엄마는 또 그집 채소 화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물 안주면 금방 말라죽을 텐데... 내가 우리 화분 주면서 같이 물을 줘야하나... 아픈 다리로 이층에서 물조리 한 통 갖고 내려가는 것도 힘든데 내가 대체 왜?.. 뭐 이런 생각을 하셨던 거다. 다행히 그 사이 비가 몇번 내렸고, 시들시들 말라가는 채소를 차마 그냥 보아넘길 수 없었던 엄마는 간간이 조리에 받아간 물을 아껴가며 이웃 화분에도 나눠주었던 듯했다.


오지라퍼 할머니는 아래층 이웃이 돌아오기를 괜히 오매불망 기다렸다. 기껏 심은 모종 다 말라죽으면 어떡하냐. 아들이 다녀는 가던데 화분에 물은 안주는 것 같더라. 물 덜 줘서 축 늘어진 모종 불쌍해서 어쩌냐... 제일 안쪽 화분은 팔이 안 닿아서 물을 줄래도 줄 수가 없던데...  아 놔;;;;


보름이 지나고 드디어 아래층 이웃이 돌아온 듯했지만, 엄마의 관찰 결과 더는 현관문을 열어놓고 살지 않아 사람 얼굴을 볼 수도 없고 채소 모종은 계속 축 늘어져 말라가고 있다고 또 성화를 하셨다. 아 진짜! 엄마! 상추모종 천원에 다섯개라며! 고추모종도 그렇고! 죽으면 좀 어때요! 물 주기 귀찮아서 죽이기로 했나보지! 아래층 아줌마 만나면 그간 내가 화분에 물 줬다고 생색내고 싶은 거예요??? 그거 아니면 제발 남의 일에 간섭도 걱정도 좀 하지 마세요!! 


그러더니 며칠 전에 드디어 아래층 영국남자랑 마당에서 뙇 마주쳤다는데 당황해서 엄마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하고 들어왔다고 '안녕하세요' 그럴 걸 그랬다고 후회 또 후회.... ㅠ.ㅠ 난 또 버럭했다. 아니, 할머니를 봤으면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했어야지, 엄마가 왜 미안해하고 그러냐고! 그리고 영국사람들 원래 쌀쌀맞으니깐 곰살맞게 인사받는 거 바라지도 마셔! (그간 효녀 코스프레 한 얘기만 적어서 그렇지, 내 본모습은 이렇게 표독스럽다;;;)


사실 나도 이 동네 30년 넘게 살고 있지만 원래부터 잘 알던 이웃이 아니고선 같은 골목 주민들에게도 선뜻 인사를 하게되질 않는다. 오지랖 넓은 엄마 덕분에 나는 반장 아줌마도 알고, 야쿠르트 아줌마도 알고, 같이 실버합창단 하시는 옆 빌라 안X분 할머니도 알지만, 저들은 은둔형 인간인 나를 잘 모르는 게 확실하다. 제대로 하는 외출이 아닌 한 꽁지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쓰거나 후드를 뒤집어 쓰고 나가기 때문에 어차피 인사를 해도 몰라본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다. 원래 마구 상냥한 스타일도 아니고 뭐... 


하여간에 엄마는 혹시나 또 영국인 남자와 마주치는 경우를 대비해서 당황하지 말고 '안녕하세요'라고 하겠다고 시뮬레이션 연습까지 마치셨는데 이후 아줌마도 아저씨도 대면한 적이 없단다. 오히려 나는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골목 어귀에서 하얀 '난닝구'에 반바지 차림 + 왕뿔테 안경을 쓴 배불뚝이 영국 아저씨랑 마주쳤지만 바로 집앞이 아니라 인사하기도 웃기고 해서 당연히 모른체했다. 나도 마당에서 마주치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연습이라도 미리 해둬야하는 건가. ㅋㅋㅋ 


그간 런던아줌마' 블로그를 통해서 영국사람들이 얼마나 '못버리는 병'에 걸린 환자들인지 전해듣기도 했지만 가끔 마당구석에 정말 신기한 물건들이 하나씩 놓여서 시선을 끈다. 최소 50년은 된 것 같은 다 떨어진 구식 여행가방이라든지, 다리가 기울어진 나무 의자라든지... (그럴 때마다 울 엄만 또 혼자 꿍얼꿍얼 하신다. 아니 그런 물건은 이사올 때 버리고 와야지 왜 다 갖고 와서 새삼 쓰레기를 만드나 그래..)


어쩌면 그 이웃집에서도 위층에 '이상한' 할머니 모녀가 산다고, 귀찮아 죽겠다고 꿍얼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이웃이란 아무래도 서로 적응해나가는 기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나저나 그 옆집, 내방 쪽 아래층엔 이사온지 6개월도 넘었는데 아직 사람 구경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사는 흔적도 없고... 한전과 가스공사에서 체납고지서를 보내다보내다 못해 사람이 나와, 그 집에 사람 안 사느냐고 우리집을 두들기고 물었을 정도. 이웃사촌이란 말은 사라진지 오랜 도시에서 암튼 새 이웃 덕분에 포스팅도 하고 나도 좀 웃기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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