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둠 과제 발표?

투덜일기 2015. 4. 15. 18:26

6학년짜리 조카가 어제 저녁에 난데없이 인터뷰(?) 요청을 했다. 엄밀히는 조카가 직접 한 것도 아니고 올케가 전화를 해서... +_+ 학교에서 '직업탐구'와 관련된 모둠 과제 발표가 있는데, 조카녀석이 자기 고모가 번역하는 사람인데 만나보면 어떻겠느냐고 같은 모둠 아이들에게 의견을 냈고 다들 동의를 했다나. 아 근데 왜 나한테는 미리 말도 안하고! 


암튼 과제 발표 및 제출 기한이 내일이므로, 마침 개교기념일이라 노는 날인 오늘 당장 인터뷰할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 했다. 아 놔;;; 조원은 남자2, 여자 2인데, 여자애들은 다 바빠서 인터뷰에 참여할 수 없고 조카와 친구가 인터뷰를 진행하면, ppt파일 만드는 건 여자애들이 담당하기로 했다나 뭐라나...  


조카는 여자애들이 바쁘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추측했다. 말로는 학원에 간다지만 어차피 평일이라 당연히 오후에 갈 텐데, 오전이나 점심때쯤 한두 시간 짬을 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그냥 귀찮은 거라고...  말을 듣고 보니, 애 엄마도 아니면서 돌연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요즘 여자애들 워낙 영악해서 수행평가에서 특히 탁월한 솜씨를 보여 남자애들이 감히 따라가지도 못한다더니만... 귀찮고 생색 안나는 일은 남자애들 시키고, 지들은 그럴듯하게 다 해 놓은 과제 발표만 맡겠다는 심보인가? -_-+++


아무튼 난데없는 상황에 팔불출 고모는 거절할 수도 없고, 그저 따라나서는 수밖에. 으휴...

그래도 계속 투덜투덜... 출판사나 주변에서 하루 전에 이런 인터뷰 하라고 통보하면 절대 안해주는데!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려면 미리 질문지를 주고 준비를 시켜야지! 했더니 녀석은 공책 반장 찢어 적은 질문 10가지를 쓱 내밀었다. 번역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왜,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학력조건, 이제껏 번역한 책, 번역하며 느낀점, 포기하고 싶었던 적, 앞으로의 활동 계획.... 으아 인터뷰 질문이 꽤나 날카로웠다. 언젠가 대학생 애들이 물어본 내용이랑 하나도 다르지가 않잖아! 누가 정한 질문이냐고 물으니, 역시나... 다들 의논을 하긴 했지만 여자애 중 하나가 적어줬단다.


또 준비할 건 없으냐고 물었더니 번역한 책들 몇권 가져가라고. 심드렁하게 대충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어떤 책을 가져갈지 콕 찝어서 골라주었다. 영화 덕에 초 베스트셀러 됐던 그 책이랑... 번역과정에서 녀석이 계속 참견했던 최근 시리즈물이랑.... ^^;;

그러고는 약속장소로 가며 조카가 한 마디 또 했다. 너무 잘난 척 하지 말고, 겸손하게 인터뷰 해 줘, 고모! +_+


아무렴입쇼,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ㅋㅋ


사진도 찍어야해? 

응, 근데 얼굴 공개되는 거 싫으면 모자이크 처리해줄게. 

땡큐.. 근데 인터뷰 내용은 받아적을 거야, 녹음할 거야? 

받아적기도 하고 녹음도 할 거야. 근데 음성변조도 해줄게. 

으잉? 어.... 얼굴 모자이크 하고 음성변조하고 그러면... 좀 범죄자 같지 않을까?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으음.. 고맙긴 한데...

내맘이야!

아, 눼;; 그러세요 그럼...


덩치만 컸지 둘째라 집에선 아직도 애기처럼 굴고 노상 휴대폰 게임만 하는 것 같더니만, 밖에서 보니 녀석은 또 느낌이 달랐다. 뭔가 더 훨씬 의젓하고 진지하고... 친구랍시고 엄마를 대동하고 나타난 아이는 덩치가 조카녀석의 절반도 안되는 깡마른 몸매에 테리우스 머리! @.,@ 여자애들 못지 않게 찬찬하고 똘똘한 아이였고, 조카놈이 시키는 대로 인터뷰 질문과 진행은 그 녀석이 도맡았다. 조카 녀석은 마치 엔지니어나 PD라도 되는 듯 음성녹음을 실행하고 질문과 대답을 대충 메모하고, 내 대답이 길어지면 입모양으로 너무 길다고 눈치주고 그만 줄이라고 손짓을 하질 않나, 나름 총지휘 역할. 인터뷰 시작과 끝 마무리 멘트도 소곤소곤 친구에게 사주했다. ㅋㅋ 


카페 한 구석에 앉아서 녀석들이 시키는 대로 따박따박 대답하고 앉아 있으려니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 민망하기도 하고 녀석들이 대견하기도 하고... 아 요즘 애들은 5, 6학년이면 벌써 이런 모둠 과제 발표를 하는구나. 중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대학생때도 수업에 조별 과제발표 꼭 있다던데 우왕... 


다른 모둠은 의사, 교수도 만나러 가고, 학교 선생님을 인터뷰하기로 한 애들도 있고, 방송국도 가고 했다는 말에 괜한 자격지심이 든 나는 다들 뭔가 직업이 더 빵빵한데, '겨우' 번역가로 경쟁이 되겠어? 물었더니 '당근'이란다. 뭐 그렇다면야 안심... 


남은 건 아이들이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서 ppt를 얼마나 근사하게 만들어 발표를 하느냐는 건데, 결과물이 어떨지 진짜로 궁금해진다. 대담 원고 정리하고 사진 앉히고 그러는 건 아무래도 인터뷰에 직접 참여한 애들이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었는데 과연? 요즘 열혈 부모들은 따로 숙제 전담 과외선생을 붙이거나 전문가한테 돈을 주고라도 화려한 ppt 파일을 의뢰하고 난리라던데, 조카네 모둠 아이들은 겨우 반나절 머리 맞대고 어떤 걸 만들어낼지... 다 차려진 밥상에 밥숟갈만 얹으려고 했던 여자애들은 어떻게 거들기로 했을지 (조카는 걔네들이 도와준 게 하나도 없으니 이름을 아예 빼버리겠다고까지! ㅋㅋ)... 또 괜한 걱정을 하고 앉았다. 


하여간에 조카 덕분에 퍽 색다르고 신기하고 오글거리는 경험이었다. 계속 뭔가 더 밥벌이가 좋은 ㅠ.ㅠ 재미난 일은 없을까 기웃기웃하면서 자학했던 마음도 애들 질문에 대답하며 새삼 반성이 되었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가난하지만 무엇보다 보람 있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게 중요하지 암;;; ㅠ.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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