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 무국

식탐보고서 2015. 3. 6. 01:40

한밤중에 일하다 말고 종종 국을 끓인다. 큰 냄비에 잔뜩 국을 한번 끓이면 꼬박 서너끼는 먹을 수 있는데, 공교롭게 딱 엄마가 홀로 챙겨드실 아침에 먹을 국이 없으면, 괜히 신경이 쓰여서 일도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저녁 설거지 하면서 미리 생각해서 찌개나 국을 만들어놓기도 하는데, 오늘은 냉동실에 얼려놓은 고기 녹이는 걸 너무 늦게했다. 


여름엔 당연히 잘 안 끓이고, 봄과 가을에도 종종 생략하지만, 추운 겨울 동안엔 밥상에 국이나 찌개가 없으면 아무리 반찬을 많이 해놓아도 밥순이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 같은 자격지심에 휩싸인다. 뜨끈한 국물은 고혈압의 적! 아무리 싱겁게 끓인다 해도 국물은 남기시오! 찌개랑 국도 그냥 젓가락으로 건더기 위주로 먹기! 밥상머리에서 온갖 잔소리를 해대면서 또 국물이 없으면 찔리는 건 뭔가. 쳇...


해동한 쇠고기를 덩어리째 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그 사이 물을 끓이다가 고기를 풍덩. 통마늘도 대여섯 개 투입. 대파와 표고버섯도 숭숭숭 썰어넣은 뒤, 고기 익는 동안 달큰한 제주도 무를 나박나박 썰었다. 쇠고기 무국은 정말로 겨울에 먹어야 제일 맛있는 듯. 여름무는 종종 쓰고 매워서 똑같이 끓여도 맛이 없다. 30분쯤 끓여서 덩어리 고기가 다 익으면 집게로 붙잡고 가위로 조각조각 먹기 좋게 자른다. 식가위 없을 땐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몰라. 포기 김치도 당연히 가위로 잘라 먹는데, 이젠 아주 제법 가지런히 도마에 자른 것처럼 차곡차곡 잘라 그릇에 담는 신공까지 익혔다. ^^v


물론 명절이나 제사 때 올리는 탕국을 끓일 땐 상스럽게(!) 가위질을 하면 안되니깐 특별히 좋은 양지를 사다가 익혀서 결 따라 찢어 따로 국간장에 참기름에 갖은 양념을 해 놓았다가 고명을 올리듯 다시 탕국에 데워 수북하게 놓는다. 그치만 그냥 두 모녀 먹자고 그런 정성을 들이긴 싫다! 가끔 괜한 정성이 뻗쳐서 얼마 되지도 않는 뜨거운 고기를 건져 양손에 비닐 장갑 끼고 찢고 있노라면 괜히 서러워지는 걸 ㅠ.ㅠ 암튼 그래서 대충 먹는 쇠고기 무국 고기는 그냥 가위질로 낙착. 무는 금방 익으니깐 투입 시간은 고기 자르고 나서.


고기가 더 잘 무르기까지 총 1시간은 족히 끓여야하니 계속 시간을 확인하느라고 어차피 일엔 집중할 수가 없다. 자칫 까먹고 있다가 몇시간 지나 홀라당 국물이 졸아버리면 큰 낭패. 국냄비는 아직 그런 적이 없지만 찻주전자는 물 올려놓고 딴짓하다 하도 많이 태워먹어서리... -_-;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풍긴다. 요번에 표고버섯이 좋았나? 아니면 무가 특히 달콤한가? 아직 소금도 넣기 전인데 다른 때보다 더 감칠맛 나는 냄새가 풍기는 이유는 뭐지? 쇠고기는 늘 사던건데... 이건 마치 그 옛날 방학때 놀러간 외할머니댁에서 아침 일찍 잠결에 풍겨오던 추억의 냄새 같기도 하고. ㅋㅋ 우리집이나 친할머니 댁에선 특별히 아침밥 준비하는 냄새에 잠을 깬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한옥집의 구조 때문인지 외할머니댁에서 자면 안방에서 자든, 건넌방에서 자든, 뒷채 구석방에서 자든 고소한 나물 볶는 냄새나 구수한 국 냄새에 선잠이 깨곤 했다. 심지어 새까만 가마솥에 짓는 밥냄새도 분간이 되어, 노랗게 일부러 눌렸다가 통째로 들어내는 바삭한 가마솥 누룽지 먹을 생각에 자다말고 침을 삼기키도.


물론 일찌감치 아침밥 먹으라고 할머니가 깨우면 이잉 이불 쓰고 누워 버티다가 느즈막하게 한번 더 차린 아침상을 게으름뱅이들끼리--외삼촌들, 사촌언니, 그리고 나--둘러앉아 먹었었다. 그때 먹은 무국엔 분명 쇠고기는 없고 다시마랑 무랑 표고버섯이랑 유부가 들어 있었는데, 어떻게 지금 내가 끓이는 거랑 냄새가 똑같다고 느껴지는지? 내 착각이 틀림없다. 내가 '기억'한다고 우겨대는 수많은 추억들이 상당부분 왜곡되어 실제와 거리가 있듯이, 추억으로 남은 냄새도 내가 막 제멋대로 꾸며댔을지 모르겠다. 


느릿느릿 이 글을 적어대는 사이 1시간 경과. 드디어 소금으로 슴슴하게 간을 하고 가스불을 껐다. 이젠 그만 일할 시간.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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