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인생

투덜일기 2014. 9. 11. 21:37

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아직도 가끔씩 조카의 학원 앞으로 시간 맞춰 픽업을 간다. 서로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아도 우리의 접선지점은 늘 학원 건물 골목 입구의 편의점 앞. 물론 붐비는 곳이라 차를 세울 곳이 마땅치 않으면 한바퀴 다시 근방을 돌아야할 때도 있고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며 어느쪽으로 더 오라고 문자를 넣어놓기도 한다. 


그런 날이 두어달 이상 반복되자 이젠 나처럼 픽업 나온 몇몇 자동차까지도 눈에 익었다. 그 중 아무래도 시선이 가는 건 조카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태워가는 자동차들. 나는 멍하니 기다리며 허비하는 시간이 아깝고 싫어서 학원 마치는 시간을 아주 딱 맞춰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거의 6시면 6시, 6시반이면 6시반 정각에 학원 골목으로 들어선다. 그럴때 늘 나보다 먼저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고 기다리는 차가 있는데, 조카와 같은 반은 아니고 같은 학년이라는 몸집 작은 아이를 데리러 오신 할아버지가 그 주인공이다. 그 아이는 학원에서 나오면 할아버지 차를 향해 후다다닥 뛰어간다. 다음 학원으로 재빨리 이동해야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기다리는 할아버지에게 미안해서 또는 반가워서 뛰어가는 것일까 궁금하지만 알아볼 길은 없다. 아주 가끔 30분 넘게 기다리느라 붉으락푸르락 아 대체 왜 안끝나느냐고 조급한 문자를 서너개나 보내놓아도 절대 뛰는 법 없이 느긋하게 걸어와, 고모 안녕, 그러는 조카와 참 다르구나 할 뿐이다. ^^


또 다른 빨간 차는 조카와 같은 반이라는 ㅅㅇ의 엄마라는데, 나보다 빨랑 데리러 온 적은 한두 번 밖에 없는 것 같다. 어리바리 대타를 뛰는 나보다 학원의 생리를 더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놈의 학원선생은 수업시간이 끝나도 아이들이 정해진 문제를 다 풀지 못하면 붙잡아놓고 끝까지 다 풀게 한단다. 혹시 숙제를 안 해가면 벌로 남아서 예전 숙제를 다 해야 집에 보내준다고.... ㅋㅋ  암튼 그 녀석과 나의 조카는 분명 엄마와 고모가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도 느긋하다. 심지어는 잠깐만 더 기다리라며 우르르 친구들과 편의점으로 쏙 들어갈 때도 있다. 누군가 차로 데리러 온 아이들도, 그냥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집으로 가는 아이들도 '다음 사교육'의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간단히 요기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나의 조카는 대개 우리집으로 저녁 먹으러 오거나 바삐 다음 과외를 위해 지네 집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편의점에 들러 간식 먹을 필요도 시간도 없는데, 이놈이 간혹 친구들에게 '티머니로 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호기를 부리는 거다. 아 놔;;;


보아하니 부지런하게 애들을 실어나르는 엄마나 조부모들은 아예 미리 준비해간 간식을 차에서 먹이는 것 같다. 올케도 학교에서 기다리다 학원으로 데려가며 늘 차에서 뭔가를 먹였다고 들었다. 편의점에 우르르 몰려다니며 별로 몸에 안 좋은 간식을 사먹는 행동 자체가 못마땅하다나. 하지만 편의점 앞에서 넋놓고 기다리다보면 주변 학원에서 쏟아져나온 아이들이 편의점에 언제나 드글드글하다. 그나마 노란 봉고에 실려 각각의 행선지로 실려가거나 엄마들이 차로 나르는 초등학생들은 빈도수가 덜하고, 대개는 중학생 고객들이다. (그 주변에 고딩들을 위한 대입학원은 없다;;)


대체 뭘 먹나 지켜보니 여학생들은 대개 간단하게 삼각김밥을 선택하는 것 같고, 남학생들은 컵라면이나 사발면 따위를 많이 먹는다. 물론 빵이랑 음료수를 먹는 애들도 있고, 사발면에 삼각김밥을 같이 먹기도 하고. 그러고도 뭔가 부족한지 편의점을 나올 때는 음료수와 봉지과자를 하나씩 들고나오기도... 


학원수업은 월수금이나 화목토, 일주일에 세번이니 그 아이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세번 편의점에서 저녁끼니를 때우는 건가, 아님 그냥 간식인가 궁금하다. 옛날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학교 파하고 내려오다 문방구나 분식점에서 꼭 뭘 사먹고 집에 와서도 또 저녁을 먹었으니, 삼각김밥이나 사발면이 모든 아이들의 온전한 끼니는 아닐 거라 믿고 싶다. 하지만 요즘 중학생들의 사교육 스케줄을 감안한다면.... 흠 모르겠다. 


올해 드디어 자식 입시 뒷바라지에서 벗어난 친구 하나는 중학교 3년간 매일 저녁도시락을 싸가지고 아들을 이학원 저학원으로 실어나르더니 염원하던 외고엘 보내는데 성공을 거두었었다. 자기가 도시락을 안싸면 애가 떡복이나 김밥, 편의점 삼각김밥, 빵 같은 걸 대충 먹고 학원에 가서 오밤중까지 공부해야 하는데 그럼 키가 제대로 안큰다나 뭐라나... 어휴... 그나마 고등학생 되니깐 아침부터 아예 하루 3끼를 학교 급식으로 해결해서 더 편했다고 들었다. 친구가 열혈 전업주부였으니망정이지, 일하는 엄마였다면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분식점이나 편의점에서 노상 저녁을 해결하고 학원 뺑뺑이를 돌아야했을 거다.


호기롭게 엄마가 충전해준 티머니로 친구들에게 간식을 쏘겠다는 조카를 말리러(티머니는 버스 타라고 충전해준 거지! 뭐 사먹으라고 넣어준 게 아니거든!) 나도 편의점에 따라 들어간 적이 있다. 아무래도 조카는 티머니 인형을 기계에 대고 '띠릭~' 결제하는  행위 자체가 재미있고 멋져보이는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생생내다가 티머니에 돈이 얼마 남은지도 몰라서 버스에서 쫓겨내린 전적이 있는 걸 알기에 그날 친구들의 간식값은 '무수리 고모'가 내주었다. 


편의점 카운터에 서 있는 사람은 나이 지긋한 아저씨(혹시 주인일까?)와 알바생인 듯한 청년. 몇시부터 일했는지 모르지만 둘 다 얼굴 가득 피곤함과 짜증이 담겨있었다. 편의점 앞에서 조카를 기다리는 동안 가끔 이따~만한 쓰레기봉지를 내다 놓으러 나오는 알바생을 보며 난 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중고딩때 노상 학원가기 전에 편의점에서 저녁 때우던 아이가 커서 다시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게 되는 편의점 인생의 반복...  오늘도 편의점에 들러 바글바글 바삐 배를 채우던 아이들 중에 혹시 편의점 알바생이 자신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걸 짐작하는 아이들이 과연 있을까.

 

날이 더워선가, 오늘따라 교복대신 죄다 체육복 반바지 차림으로 편의점으로 몰려 들어가는 중학생들을 보고 있으려니 철커덕 조카가 차문을 열었다. 쓸데없는 상념 끝. 카레이서 고모로 변신해 15분만에 휭허니 조카를 지네 집으로 모셔야한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