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혼자

삶꾸러미 2007. 4. 11. 23:57

오랜만에 혼자 한 게 두 가지나 되는 날이었다.
그 하나는 <음식점에 가서 혼자 식사하기> ^^;
혼자서 밥을 먹는 일은 흔하지만, 작업실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배달되는 밥을 시켜먹거나
하는 일 말고 부러 나가서 음식점을 찾아가 혼자 식사를 하는 일은 그리 잦지 않다.
혼자서 영화보기는 종종 해온 일인데, 그땐 먼저 끼니를 해결하고 가거나
밖에서 먹더라도 패스트푸드 점에서 후다닥 햄버거 따위를 먹게 되기 일쑤다.
그나마 패스트푸드 점엔 혼자 먹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 마련이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패스트'푸드이니 빠르게 먹어치우고 일어나기 쉬운 것도 큰 매력이기 때문. 패스트푸드 점도 엄연히 음식점이라 할 수 있지만, 내 기준으로는 혼자 카페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음식점 홀로 식사' 범주엔 들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은 우여곡절 끝에 혼자서 여성영화제 영화를 두 편 볼 작정이었고
중간에 1시간 반 정도 틈이 생기는데다 비는 시간은 마침 저녁 끼니 시간이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끼니인 저녁을 패스트푸드 따위로 대충 때울 수야 없는법 ^^;
그래서 정식으로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챙겨먹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혼자서
음식점을 찾아가 먹고 싶은 걸 사먹은 게 거의 1년만인 듯했다.
얼마 전 엄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병원 식당에 내려가 쫓기듯 홀로 밥을 사먹은 경험은
여기서 제외다. ^^;
모름지기 제대로 사먹는 밥이란 스스로 쟁반들고 왔다갔다 할 필요 없이
테이블 차지하고 앉아 우아하게(랄 것까지는 없지만;;) 종업원의 접대와 봉사를  누리며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드라마였더라... 명세빈이 기자로 나왔던 드라마에서 문득 스테이크가 먹고싶어진
주인공은 맛있는 스테이크집엘 가서 홀로 칼질을 하는데, 그걸 이상한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명세빈은 꿋꿋하게 고기를 씹으며 ^^
혼자서도 스테이크를 먹으러 다니는 게 남들의 시선을 끌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어서 마련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드라마가 방영된 게 벌써 몇년 전이라서 그런가, 내가 간 쌀국수집엔 나 말고도 홀로 저녁을 먹는 사람이 또 있었고, '혼자세요?'라고 묻는 종업원도, '네'라고 대답하는 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남들도 전혀 관심없었고.. ㅎㅎ
간혹 이것저것 먹고싶어지는 게 많은 식탐녀로서 간혹 같이 갈 사람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 시간 맞추기 힘들어 포기하느니, 앞으로도 종종 홀로 밥사먹으러 다니기 프로젝트를 실천해봐야겠다.
물론 좋은 친구와 맛있는 거 먹으며 수다떠는 즐거움은 홀로 맛있는 거 먹으며 음미하는 즐거움에 비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두번째 영화를 보고 꽤 늦은 시간에 밖으로 나오니 뜻밖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TV 뉴스도 신문도 들여다보지 않은 터라 비가 올줄은 생각도 못했으니 우산을 챙겨갔을 리 만무했는데도, 전혀 당혹스럽지 않았다.
너무 대책없이 자란 머리칼 때문에 요즘 거의 매일 질끈 하나로 묶고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던 터라 간만에 비좀 맞아볼까.. 하는 생각이 곧장 들었던 것.
그러니까 오랜만에 내가 혼자 한 두번째 일은 바로, <의연하게 비 맞고 돌아다니기>였다. ^^
신문이나 팸플릿 따위로 머리를 가리지도 않고
조금이나마 비를 피해보겠다고 뛰어다니지도 않고
다른 때처럼 마지못한 듯 새로이 우산을 장만하지도 않고
그냥 보통 걸음걸이로 초연한 사람처럼 빗속을 걷는 기분을 느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만큼 아득했다.
꽤 굵은 빗줄기엔 아직도 약간 먼지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았지만
얼룩덜룩 옷이 다 젖는데도 기분이 그럴듯했다.

첫 영화(스파이더 릴리)를 보면서는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왔고
두번째 영화(스무살이 되기까지)를 보면서는 수시로 깔깔 웃다 두어번 눈물을 닦았는데
그렇게 펄럭거린 내 감정의 기복과도 잘 어울린 비맞기 경험이었다.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여행을 가든, 영화를 보든
뭐든 뭉쳐서 떼거리로 어울려다니는 걸 좋아하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편할 때가 차츰 많아진다.
어울림과 소통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야 물론 여전하지만,  
때로 대화와 소통의 피곤함을 잊어도 되고 번잡할 필요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보배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안 그래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인간인데, 점점 자폐성향이 짙어지는 것도 같아
한편으론 슬몃 걱정도 들지만, 혼자라서 참 좋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나름대로의 행복이라 여기련다.

행복 뭐 별 거 있어? ^^;;
(나는 늘 불행과 행복 사이를 촐싹거리며 오가는 인간임에 틀림없다)
행복한 마음을 오래 연장하는 의미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좀 뜸들였다 써야쥐!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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