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에 이어 최근엔 서촌, 부암동도 덩달아 뜨는 모양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데도 한번 발걸음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또 한번 답사 명목으로 샅샅이 돌아다닐 기회가 있었다. 그 자세한 후기는 아무래도 쓰게 되지 않을 것 같고 (벌써 오래되어 다 까먹었다 ㅜ.ㅜ) 백사실 계곡에 대한 의문만 적어둘란다.

 

서울에서 드물게 청정지역으로 남아(군사지역으로 정해 노무현정부 이전까지 오래도록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도룡뇽과 버들치가 살고 있다 해서 유명해진 곳이 바로 부암동 백사실 계곡. 얼마전 부암동 유지이자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분을 따라 그야말로 구석구석 재미난 구경을 했었다. 내가 특히 궁금했던 건 '백사실'이라고 하는 이름의 유래였다. 우리가 <오성과 한음> 일화로 잘 아는 이항복의 호가 '백사(白砂)'이고, <딱히 기록엔 없지만> 이항복의 별장 터가 그 근처에 있어 '백사실'이라는 이름이 유래했으리라는 것이 모든 안내 표지판에 적힌 유력한 짐작이었고, 해설사의 설명도 그러했다(이항복 말고 또 '백사'라는 호를 지닌 다른 인물 유래론도 있다고;;). 

 

하지만 분명한 내 기억으론 아닌데!!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백사실 계곡'은 내가 '국민학교' 시절 해마다 봄가을 소풍때 거의 어김없이 학교 운동장부터 줄 맞춰 걸어가 놀던 추억의 장소였다. 계곡 좌우에 군데군데 공터가 있어서 저학년들은 주로 계곡 아래쪽에서, 고학년들은 주로 계곡 위쪽에서 학년 별로 터를 잡고 가재 잡으며 놀다가, 점심먹고, 보물찾기 하고, 장기자랑도 하고, 수건돌리기도 하며 놀았었다. 가끔은 소풍 장소가 백사실 건너편 구기동 계곡으로 변경된 적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어린 나에게는 백사실이나 구기동이나 별 다를 게 없었다. 왜냐하면 홍지문을 지나 세검정 주변부터 줄 지어 늘어서 있는 '뱀집'들 때문에 그 언저리가 '흰뱀이 나오는 동네'(白蛇室)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론 상명대 건너편부터 세검정 정자까지, 또한 정자부터 지금은 사라진 신영아파트 상가와 건너편 삼거리 군데군데에 다닥다닥 뱀집들이 붙어 있었고, 진열장엔 하나같이 길쭉한 유리병에 담긴 '하얀뱀'들이 똬리를 튼 채로 어린애들을 위협했다. 새빨간 눈이 마치 살아있는 것만 같아서(사실 난 자세히 본 적도 없다. 애들이 흰뱀 눈은 빨갛다고 하니 그런 줄로만;;) 그 앞을 지나가는 게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서웠는데! 당연히 귀한 흰뱀이 많이 나와서 그 동네 이름이 백사실이 되었다고 했다. 이항복의 호인 '흰 모래'가 아니라! 결단코 나 어린 시절엔 '백사 이항복'이 백사실 계곡과 관련있단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규~!

 

헌데 내가 그런 질문을 했더니 20년째 부암동에서 살고 계시다는 부암동 주민이자 해설사이신 그분은 흰뱀-백사실 이야기는 완전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내가 비록 그 동네 주민은 아니지만 국민학교 졸업 이후로도 6년간 더 꼬박 중고등학교를 세검정에 있는 학교에서 다녀 '흰 뱀'이 담긴 유리병을 자랑스레 전시했던 건강원들이 하나들 자취를 감추는 모습까지 지켜본 사람 아닌가. 하기야 나처럼 같은 집에서 30년씩 막 눌러사는 서울 주민이 몇명이나 되겠냐마는 ㅠ.ㅠ 그래도 이렇게 백사실 계곡 소풍에 관한 빤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텐데, 어떻게 부암동 문화해설 체계가 구축한 '스토리 텔링' 관광에 그런 이야기가 빠져 있는지 궁금한 노릇이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검색을 해보니, 부암동 숲해설을 하는 이들은 '흰뱀-백사실' 유래와 '흰모래-백사실' 유래를 둘 다 설명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 듯했다. 하지만 종로구나 부암동 측에서는 혐오식품인 '뱀탕'과 관련된 유래보다야 지혜로운 재상의 전형인 '백사 이항복'과 연결시키는 편이 더 그럴듯하고 품위도 있어보여 그 쪽으로 밀고 있는 게 아닐까나? ㅋ 역사는 역시 권력을 쥔 자의 입맛에 따라 정리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어렴풋이 느꼈다면 너무 비약인가.

 

어쨌거나 사람의 기억이란 놀라운 것이어서 백사실 계곡을 위에서부터 훑어내려오며 둘러보니 퍼뜩, 아 이 즈음의 공터에서 둘러앉아 수건돌리기를 하고 놀았겠구나, 여기서 학년 장기자랑을 했겠구나 싶은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건돌리기에서 걸려, 벌칙으로 엉덩이로 이름쓰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라는데 둘 다 못하겠다고 서서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던 11살 즈음의 나도 떠오르고...  근 35년만의 재방문이라니... ㅠ.ㅠ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ㅎ 나는 무서워서 잘 잡지 못하고, 친구가 잡아주는 가재를 원통형의 새알초코알 통에 넣어가지고 조금 놀다 다시 물에 던져넣곤 했었는데...

 

이미 날이 싸늘해져 가재와 도룡뇽은 못봤지만 맑은 계곡 물엔 버들치인지 송사리인지 작은 물고기들이 정말로 엄청 많았다. 물고기가 제일 많이 보이는 웅덩이에 휴대폰을 들이댔으나 모래랑 색이 비슷해 하나도 안보인다. ㅋㅋ 물위에 뜬 동심원이 바로 물고기 녀석들이 만들어낸 그림...

도룡뇽, 가재, 버들치가 살고 있는 생태보전지역이라는데, 과연 아직 흰뱀도 살고 있을지 난 그것이 가장 궁금하다. 그래야 내가 아는 '흰뱀-백사실' 유래설에도 힘이 실릴텐데 말이다. 그 많던 뱀탕집도 다 사라졌으니 어딘가 꽁꽁 숨어 잘 살고 있으면 좋으련만... 생태 지킴이 자원봉사자가 상주하고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또 어찌되려나 모르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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