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9개월

투덜일기 2013. 10. 7. 01:09

이만하면 나도 끈기가 있는 건가 싶은 하나의 성취.

결과적으론 1년도 못 채우고 끝나고 만 알량한 안식년을 맞아 새로운 배움으로 시작한 궁궐 공부. 1월부터 석달간 교육받고, 현장 답사 다니고, 봄부터 뜨거운 여름까지 수습활동에 힘쓴 끝에 드디어 9월말에 모든 과정을 끝냈다. 중간에 관둘까 말까 고민도 되고 나가기 싫어서, 또는 바빠서 몇번 빠지기도 하면서 일단은 마무리를 짓기로 결심해놓고, 그게 옳은지 그른지도 계속 고민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버텨낼 수 있을지 그 또한 미지수다. 뭐랄까, 내가 그간 생각해온 나름의 취향과는 워낙 맞지 않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숫기도 없고 낯선 사람들이 단체로 한꺼번에 쳐다보면 움츠러드는 '주목공포증'도 있는 게 분명하고, 생활한복은 '도를 아십니까' 관련자들이나 입는 '도나기 복장'이거나 머슴/몸종 같아 보여 싫다고 부르짖던 내가...

 

어찌보면 이제는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생각에 종종 억울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모름지기 자원봉사란 여유있고 잘난 사람들이 벌이는 일종의 '허세놀음'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정식으로 2주에 한번씩 궁궐 안내를 시작했다. 문화재청 소속 해설사들은 1시간 안팎으로 깔끔하게 딱 끝내는 해설을 자원봉사자들은 친절하게도 1시간 반은 기본, 더 자세한 해설을 원하면 3시간까지도 정성을 들여 구석구석 안내를 한다. 각자 만든 안내 매뉴얼을 모조리 익혀서 관람객 수준에 따라 적절히 설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드넓은 궁궐을 쏘다니며 떠들어대려면 체력이 필수!

 

마지막 수습활동 이후 근 한달간 집에만 콕 박혀 있다가 엊그제 정식 활동을 시작한 날, 오전에는 그 무시무시하다는 중2 여학생들과 1시간 반, 오후에는 천방지축 초딩들을 데려온 열혈 학부모들과 2시간을 꼬박 돌아다녔더니 집에 와 장렬히 전사한 건 물론이고 일어나 보니 입술과 입안이 다 부르텄다. 또 한 번 이 뭔짓인고 싶어지는 순간. 게다가 초절정마감기간에 연일 밤샘까지 ㅠ.ㅠ

 

그런데도 우스운건 그런 부담스러운 상황 속에서 일말의 '보람' 같은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점이다. 배워도 배워도 도무지 끝이 없는 듯한 역사와 건축, 동양사상, 한옥 관련 지식들을 주워듣는 기회가 많기도 하지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졸졸 따라다니는 관람객들을 대하다 보면 왠지 궁궐과 한옥 애호가 동지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은 정말 귀엽다! 교생실습 나갔을 때도 편애할 수밖에 없는 예쁜 아이들이 있음을 깨달았지만, 궁궐에 현장학습을 나온 아이들 중에서도 하는 짓 예쁜 아이들은 척 보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따분하다는 듯 시큰둥하게 굴던 여중생들도 "얼른 그늘로 들어오세요, 여러분 피부는 소중하니까요!"라고 한 마디 해주면 빵 터져서 잘 따라온다. 귀여운 녀석들... 

 

암튼 그래서 싫어하는 생활한복을 떨쳐입고 한달에 두번이나 내가 자원봉사를 시작했다는 의미다. 으뜸 궁궐에 어울리게 이왕이면 화려한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선배 해설사샘들은 철철이 수십만원, 심지어 백만원도 넘는 멋진 한복을 장만하는 모양이지만, 고1 이후 한복을 입어볼 기회가 전혀 없던 나로선 그나마 비교적 저렴한 생활한복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내 기준으론 저렴하지도 않아! 다달이 회비 내고 활동하는 자원봉사를 위해 이미 의상비에 수십만원을 지출했다는 것이 나도 놀랍다. 그치만 내 눈에 전혀 안 예쁜 옷을 입을 순 없잖나... ㅠ.ㅠ 이러다 나중엔 나도 눈 뒤집혀서 막 수공예 전통 한복 맞춰입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ㅋㅋ

 

엊그제 안내 도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자경전 앞에서 열한살짜리가 던진 질문. "어? '십장생'이래! 그거  욕 아니에요?" +_+ 요즘 애들은 '시베리아'와 더불어 '십장생'도 욕이라 함부로 말하면 안되는 줄 알았나보다. 어휴... 십장생은 말이죠, 욕이 아니라 죽지 않고 아주 오래 사는 열 가지 자연과 생물을 말하는 거예요. 해, 달, 구름, 바위(산), 물, 거북, 학, 사슴.. 등등을 가리키지요. (나도 아직 다 못외었다 ㅋ) 어쩌면 배워야 할 게 무궁무진하고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아직은 이 난데없는 시도에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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