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딴소리 먼저... (난 왜 이렇게 쓸데 없는 서론이 늘 긴지 몰라 -_-;;)
몇달 전 블로그를 시작하며, 여기엔 싸이와 달리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와 신변잡기적인 자랑은 '지양'하며서 책과 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하고, 생각을 좀 더 다듬은 이야기들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문득 '식탐'이라는 태그가 제일 크게 주황색으로 떠 있는 걸 보니
새삼 내가 그간 줄곧 대단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신변잡기적인 자랑을 삼가는 대신 오히려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허거걱.
물론 삶은 늘 계획대로 생각대로 풀려 나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걸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반성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가끔 가서 훔쳐보는 루인님의 글이었던가, 하루하루의 끄적임이 배설 같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는데, 별 부담 없이 낙서 하듯 적어내려가는 이 블로그의 글들이 내게도 크고 작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배설임엔 틀림없지만, 잠시 정신 차리고 되짚어 보니  배설이란 본인에게나 시원할 뿐이지 남들이 지켜보기엔 냄새 고약하고 추잡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나에게 한정된 비유일 뿐, 루인님 같은 분의 손가락으로 배설된 글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유머와 재기가 번뜩이거나 사색과 성찰의 향기가 풍기는 이웃 불로거들의 글과 사진들은 그야말로 '주옥' 같다.)

이런 자성 끝에도 아마바처럼 다 잊고 금세 난 또 희희낙락 화장실 낙서 같은 이야기들로
이 공간을 채워가리라는 것 또한 잘 안다.
품위 있고 진지한 생각이 담긴 글쓰기만 하라면 난 아마 미쳐버리거나
원고 10매짜리 알량한 옮긴이의 말을 쓸 때처럼 끙끙거리며 괴로워만 할 뿐
텅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기 십상이니까. ^^;;

암튼 좀 민망하긴 하지만 혼자 옆구리 찔러 절하고 절받는 심정으로
이제부터는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 이야기를 살짝 할 생각이다.

원고가 밀리는 바람에 작업 순서가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하여간 지금은 천문학을 중심으로 과학을 다룬 책을 번역하고 있는데
나로선 처음 옮기는 과학책이라 의미가 깊기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특별히 옮긴이로서의 최면을 걸지 않아도 은근히 재미가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과학분야의 책을 옮긴 전적도 전무할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의 책읽기에도 몹시 소홀하여,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과거에 읽은 과학 관련 책이 무엇이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간은 정말로 말랑말랑한 책을 주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독서 측면에서도 말랑말랑 흐물흐물한 책 아니면 지적 허영심을 어떻게든 채워보려는 심보로 인문학 관련 책만 들춰본 듯하다.
<TV, 책을 말하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가끔 과학 책을 선보이면
우와 재미 있겠다, 읽어봐야지.. 중얼거리다가 결국엔 흐지부지 잊고 만 게 대부분이었다.
흥미로운 소설이나 역사서 같은 건 구매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던 걸 보면
내가 어지간히 과학을 멀리하긴 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수학을 무서워하는 근본적인 사고가 지금까지 작용해
과학마저 덤터기로 거부하는 본능을 보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
이번 작업을 하면서 느낀 건 생활 속에 아주 밀접하게 침투한 과학(어쩌면 보편적인 상식인데 나 혼자 과학이라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ㅋㅋ)이 실제로는 꽤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미터법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세계표준으로 삼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추진되었으며 과거에 쓰이던 야드와 인치, 마일 따위가 자의적이고 나름 독선적인 규정이었던 데 반해,
1미터는 지구 원주의 4분의 1 (그러니까 북극이나 남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을 천만으로 나눈 길이여서, 어느 나라에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었다는 것. @.@

문과 출신이라 과학이라곤 생물과 화학만 살짝 거치고 지나갔지만
과학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면 이과반 친구들이 신물나게 괴로워했던 물리나 지학도
꽤 흥미로운 시각에서 공부할 수도 있겠다는 뜬금없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물론 원서 뒤쪽에 꽤 골치 아프게 생긴 그래프와 수식들이 보여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긴 하다 ㅎㅎㅎ)

원래는 본격적인 번역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원서를 일단 끝까지 읽어본 뒤
소설의 경우 필수적인 인물관계나 상황을 설정해두고
비소설의 경우에는 문체와 분위기를 미리 파악해 번역의 방향을 정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나의 첫 과학책 작업이라 처음 번역을 결심할 때도 앞뒤 부분만 조금씩 훑어보고는 분야의  범위를 넓히는 의미에서 무조건 해보리라 작심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고,
혹시나 수학과 과학을 한꺼번에 싸잡아 두려워하는 마음이 책에 대한 멀미로 이어질까봐 염려스러워 본격적인 정독 작업을 건너뛰고 무작정 씨름을 하고 있었기에
나로선 이 책이 재미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___^

올해 안엔 주로 역사서와 소설만 주르륵 계약되어 있으니
다시 과학책을 번역하는 재미를 느끼는 건 한참 뒤로 미뤄야겠지만,
원고를 넘기고 나선 삶 속의 과학을 돌아보는 독서를 이제라도 간간히 해볼 작정을 품었다.

이 고무적인 생각을 연장하여...
이제 생새벽 딴짓은 중단하고 어서 작업에 몰두하자! ㅎㅎ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