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

투덜일기 2013. 5. 25. 12:47

나는 급식과 대체로 친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어려선 당연히 도시락 세대였고, 그 이후엔 선택의 여지가 조금은 있다 하나 단체급식과 다를 바 없는 저렴한 학생식당의 '스텐' 식판과 푸슬푸슬 찐밥과 배식대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싫어서 가능하면 교문 밖 분식집에서 차라리 라면을 먹었다. 그도 아니면 하숙하는 친구의 월식 식권을 축내거나...  배식구 근처에서 풍기는 그 혐오스러운 냄새를 누군가 '잔반' 냄새라고 가르쳐주었다. 어쩔 수 없이 쌓인 음식물쓰레기의 냄새. 저렴한 밥을 먹는 대가로 반드시 본인이 큼지막한 그릇에 쓸어모아 두어야 하는 오물그릇. 방금 맛나게 먹은 음식들이라 해도 한데 뒤섞여 국물과 함께 처참하게 모여 있으면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그 자태. 배식구와 퇴식구가 아무리 멀어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 잔반의 냄새가 나는 정말이지 토나오게 싫었다.

 

급식에 대한 인식이 완전 바닥인 나와 달리, 유치원이며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어김없이 급식에 익숙해져야 하는 요즘 아이들은 또 생각이 다르겠지 싶으면서도 여전히 염려스럽다. 누군가는 엄마들이 도시락 싸기에서 해방된 게 여성참정권만큼이나 중대한 일이라고 하고, 웬만한 학교는 부실한 엄마표 집밥보다 급식이 훨씬 더 알차다는 말도 들었지만, 아직까지도 급식 담당 외식업체와 교장의 담합이나 유통기한 지난 식재료를 공급하다 걸린 사건이 종종 있는 마당에, 애들 급식이 정말로 영양과 맛 면에서 합격점인지 어쩐지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나도 최근 다시 3500원짜리 구내식당 밥을 2주에 한번 먹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나마 식판은 아니고 큼지막한 스텐 대접을 주로 쟁반도 없이 덜렁 국그릇과 함께 들고가 먹지만 단체급식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하구나 느낀다. 잔반통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음식물쓰레기 줄이기 운동 중이라고 사방에 적어놓은 덕분인지 퇴식구 앞에 놓여있는 잔반통은 흔히 식당에서 뼈통으로 쓰는 작은 스텐그릇이고, 주로 국국물만 버려지는 것 같다.(아마도 자주 비우겠지;;) 언젠가 심히 배가 고팠던 내가 밥을 좀 많이 퍼서 덮밥 양념을 달라고 내밀었더니, 아주머니가 밥 많아서 남기겠다고 덜고 오라고 했다.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내가 봐도 많았다. 그대로 시도했다면 꾸역꾸역 다 먹었을지 남겼을지 그건 모를 일이지만;;) 얼른 전기밥통에 다시 덜어냈다. 자기가 푸는 음식 양도 잘 조절을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퍼준 급식밥을 말없이 다 먹어치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뜬금없이 급식과 잔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건 막내조카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조카가 급식 때문에 고전중이라고 들은 탓이다. 원래 좀 편식이 심하고 양도 적어 염려를 했지만, 유치원에선 그래도 잘 먹는 편이라 적응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근데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훈육방식은 유치원 선생님과는 당연히 다르고, 오십대 베테랑 선생님들이 주로 맡는 1학년 급식은 종종 '억지로 참고 빨리 먹기' 훈련인 것 같다.

 

집에선 밥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으라고 가르치는데 아 왜!? 거기다 '국물' 문제가 또 큰 걸림돌이란다. 우리집은 특히 가계 모두 고혈압 인자가 있어서 간을 최대한 싱겁게 하는 편임에도 '국물은 다 먹지말고 남겨!'가 식탁의 모토다. 수년간 잔소리를 해댄 끝에 왕비마마는 요새 아예 국과 찌개를 젓가락으로 드실 때도 많다. 실버아카데미에서도 매번 강조한단다. 한식의 국물만 안 먹어도 나트륨 섭취량을 대거 줄일 수 있다고. 작은올케는 국을 아예 안 끓여먹을 때가 많단다. 국이 꼭 있어야 밥먹는 식구들이 아니니 상관없다.

 

헌데 조카의 담임선생님은 국을 국물까지 다, 남김없이 먹어야하는 걸 급식교육의 모토로 삼으신 분인가보다. 먹기 싫으니까 아이들이 국은 조금만 달라고 해도, 그걸 또 용납 안하신단다. 모든 반찬을 적당량 다 남기지 말고 먹어야한다고. 아 대체 왜!?!? -_-;; '밥먹기 속도와 국'에 대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틈 사이에서 된통 고생하는 건 물론 조카녀석이다. 먹기는 싫은데 버리진 못하게 하고... 그러다 보니 맨날 밥을 늦게 먹어서 선생님한테 미운털 박히고 혼나고... 심지어 얼마전엔 점심시간 끝나도록 식판을 못 비운 우리 조카에게 국 다 먹을 때까지는 어림도 없다며 홀로 책상에 식판을 두고 5교시를 지내게 했단다. 다른 애들 다 책 펴놓고 공부하는데 혼자 냄새나는 식판 앞에놓고 앉아있으면서 여덟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부 학교에선 환경과 아이들 편식 고치기의 일환으로 반마다 나오는 급식 잔반의 양으로 담임 선생님들 인사고과 점수를 매기는 데도 있다고 들었다. (아 정말 학교가 미쳤다;)  인사고과까지는 아니더라도 잔반이 제일 많이 남은 반 선생님은 교장한테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암튼 급식 때문에 아이의 수업권을 박탈했다는 얘기를 전화통화 하다가 전해들은 나는 대번에 "그 선생 미친 거 아냐?"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이들의 편식을 고쳐주려는 의도도 알겠고, 음식쓰레기를 줄여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는 방침도 알겠고, 1학년이니깐 더더욱 학교 규율에 적응시키려 더 엄하게 한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밥 늦게 먹는다고 선생님이 아이를 미워(?)하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얘기들 들어보니 조카는 학교에서 담임선생님한테 한번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달리기에서 무려 1학년 전체에서 1등을 했다는데, 그거야 담임의 판단력이 개입할 수 없는 분야라서 어쩔 수 없었을 거다. 그 외엔 밥 늦게 먹고 국물 안 먹고, 숫기 없어서 발표 잘 안하고, 수업중에 친구가 말시키면 대답해주다가 걸려서 수업시간 내내 팔 들고 벌 서고, 엄마가 치맛바람 일으키며 찾아다니지도 않는 조카녀석은 그냥 밉상으로 찍혔구나 싶다. 다른 건 몰라도 '그림' 하나는 미술학원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주변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뜨르르 실력을 인정받았던 조카의 그림을 담임 선생님은 여태 단 한번도 칭찬해주지 않았다.

 

그림 잘 그렸다고 교실 뒤에 붙여놓고 상도 주었다는 아이들 작품을 가서 보고온 올케 역시 당연히 마음이 상했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제도권 교육에서 원하는 '얌전한' 그림이 따로 있다지만, 디테일한 스케치 묘사력과 색채감과 아이디어가 정말로 남다른(! 팔불출인 거 안다 ㅋㅋ) 그림을 몰라보다니 쳇. 아무리 전문가가 아니라도 미술시간에 과정을 둘러보면 누가누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는지 척 대번에 알지 않을까? 특히나 칭찬과 격려가 중요한 1학년 아이들에게는 아무리 편애의 마음이 들더라도 골고루 상을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그리다 만 거 같은 그림인데도 순전히 밥 빨리 먹고 담임 말에 고분고분한 아이들이 그렸다는 이유로 잘 그렸다고 상주고 교실에 붙여놓고 그럼 안되는 거 아니냐고!! 애들 그림이 죄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뭔가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지!!

 

급식 문제로 여전히 선생님한테 만날 혼난다는 조카에게 얼마전엔 내가 못된 반항을 가르쳐보았다. <우리 할머니가 국 국물 먹으면 고혈압 걸린다고 먹지 말랬어요!>카드를 써보라고 한 거다. ^^;; 그럼 선생님도 좀 이해를 해주거나, 속으로 엇뜨거라 하거나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숫기 없고 선생님한테 아직은 잘보이고 싶어하는 조카는 당연히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단다. 어휴...

 

내가 조카였다면 급식 때문에라도 매일매일 학교 가기가 싫을 것 같다. 점심시간만 되면 미리부터 먹기 싫은 국물 흡입할 생각에 체기가 돌지나 않을까. 조카는 원래 집에서 밥 먹을 때도 양이 작아서 몇 숟갈 먹고는 배부르다며 끝내는 아이다. 오죽하면 몸매가 자코메티의 조각 같을라고. 그렇게 먹고도 콩나물처럼 키는 쑥쑥 자라주니 고맙다. 하여간 학부모 면담때 급식 국물 갖고 애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선 강력하게 항의(?) 내지는 읍소라도 하겠다던 올케는 역시나 아이 맡긴 약자라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왔단다. 미운털 더 박히면 어떻게 해요... 라고. 아아악~~~! 묘안도 없으면서 암튼 요즘 급식만 생각하면 속이 상하다. 여덟살 아이는 계속되는 담임과의 대립을 과연 어떻게 풀어나갈까. 째뜬 보지도 못한 조카네 담임선생님을 엄청 미워하고 있다. 당신이 인정 안해도, 지우 실력은 어디 안간다규! 흥!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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