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노인들은 대부분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해 10년쯤 젊어보이는 쪽을 택하는 게 대세지만, 왕비마마는 염색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보다 더 늙게(!) 보는 경우가 많아 가끔 속상해하시면서도, 염색비 안들어 좋고 머릿결 좋아져서 좋단다. 정말로 몇달에 한번씩 미용실에서 염색했을 땐, 가느다란 머리칼이 파시시 까슬까슬 비비면 금세라도 다 바스라질 것처럼 윤기가 없더니, 염색 안한 이후엔 머리칼도 굵어지고 윤기도 생겨났다. 완벽한 백발이 아니라서 어떻게 보면 좀 지저분해 보이는 은발이지만, 다른 할머니들의 까슬까슬 파시시한 인공적인 검은 머리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내가 보기에도 마음에 든다.

 

나 역시 염색을 안한지 10년쯤 된 것 같다. 예전엔 나도 검정머리는 고집스럽고 촌스러워 보인다는 미용사의 권유에 따라 지조 없이 밝은 갈색, 붉은 갈색, 자연 갈색 돌아가며 머리칼을 염색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다 귀찮아졌다. 염색을 많이 하면 모발의 유전자가 변형된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도 신경이 안 쓰인건 아니지만 (그건 파마도 마찬가지라던데 뭐;;), 보통 6개월씩 미용실을 안가고 앞머리만 집에서 대강 자르곤 하는 나에게 두세달 만에 다시 모근을 물들여줘야 하는 염색은 너무 귀찮은 일. 비용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고, 왕비마마처럼 자연스러운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굳어졌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물론 남들에 비해 좀 늦게 세기 시작한 머리털 덕분이었다. 주변을 보면 삼삽대에 이미 수많은 새치가 나기 시작해 어쩔 수 없이 염색을 한다는 이도 있고, 염색을 안하면 스컹크 수준이라 주변에서(특히 배우자와 아이들이) 더 질색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사십대 들어서 한두 개씩 새치가 나는 정도여서, 비록 머리숱이 지극히 적음에도 새치가 보이면 뽑아버리는 쪽이었다. 그런 내게 친구들은 머리칼 한올이 소중한데 그걸 왜 뽑느냐고! 호통을 쳤다. -_-; 더욱이 나는 이십대부터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알머리 없는 사람이었거늘.

 

허나 오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작년부터는 나에게도 흰머리가 '다량으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끝은 검은데 중간부터 흰머리인 것도 보이고(모근이 드디어 늙은 거다 ㅠ.ㅠ) 아예 흰머리로 나는 것들도 양쪽 옆통수에 각각 열개씩 출현! 얼마 전엔 정수리에 바짝 서서 난 흰머리를 왕비마마가 뽑아주셨다. 옆으로 누워있으면 그냥 놔두겠는데 튀어나와서 보기 싫다고...

 

우리는 원래도 잡곡밥을 먹어왔지만, 오래전부터 아버지가 염색약 알레르기 때문에 염색을 포기한 이후로는 서리태와 흑미를 꼭 밥에 넣어 먹어왔고, 서리태 콩자반도 밑반찬으로 자주 등장한다. 검은콩, 흑미, 오징어 먹물 따위의 블랙푸드를 먹으면 좋다니까 먹긴 하면서도 정말로 검은머리가 나는데 도움이 되는지 어쩐지는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놀랍게도 왕비마마는 작년부터 머리칼이 다시 검어지기 시작했다. 이마 위쪽 머리는 거의 다 새하얬었는데 거기서부터 검은머리칼이 사이사이 나왔고, 귀밑머리 부분도 다시 검게 변하는 중. 왕비마마는 내가 먹거리를 잘해먹여서 회춘하는가보다고 (원래 노인들의 흰머리가 다시 검어지고 피부도 젊어지는 회춘은 90살 넘어야 하는 거라고 들었다;;) 좋아하신다. 검게 변해가고 있는 왕비마마의 은발은 동네 미용사 아줌마도 인정하는 사실.

 

그런데 똑같이 서리태, 흑미 넣은 잡곡밥 먹고 콩자반은 엄마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데(콩을 잘먹어 '콩순이'란 별명도 있었던 나는 어린시절 도시락 반찬으로  콩자반을 노상 싸줘도 좋아했었다) 왜 나는 흰머리가 점점 많아지고 왕비마마는 검은머리가 새로이 나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이듦을 받아들이겠다며, 앞으로 흰머리가 많이 나도 염색은 안하고 버티겠다면서 흰머리가 보이는 족족 뽑아버리고 싶은 나의 이 심보는 또 뭔가? ㅠ.ㅠ

 

머리칼 한올한올이 소중한 나이란 건 나도 알지만, 자꾸 뽑아버리면 모근이 스무번쯤 머리칼을 내놓다가 결국 말라죽고 만다는 무서운 이야기도 들었지만, 당분간은 흰머리가 보이는대로 족족 소탕하고 말 기세다. 흰머리 자꾸 난다고 징징대는 나에게 머잖아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 정도면 감지덕지라고, 그나마 여지껏 먹어온 서리태와 흑미 효과를 본 것일지 모른다고, 어쩌면 친할머니를 닮아서 (식성은 확실히 닮았다) 머리가 하얗게 세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왕비마마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이 위로를 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속상한 건 속상한 거고 남들과의 비교우위로는 성에 차질 않는다. 중년 이후의 삶이란 확실히 심신의 늙어감에 적응하는 과정인 듯한데, 노안도 그렇고 흰머리도 그렇고 적응과 체념보다는 버럭 화가 나고 슬퍼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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