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심기

투덜일기 2013. 5. 3. 22:14

왕비마마도 나도 오래도록 화분 죽이는 '마의 손'이었으나 이젠 사정이 다르다. 아버지가 생전에 탁상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가며 물주는 날 따져서 키우던 화분 관리를 몇년간 내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가,  왕비마마께 완전히 넘긴지가 또 몇년. '있는 화분이나 죽이지 말고 키우자'가 나의 모토였다면, 왕비마마는 자꾸만 새 화분 욕심을 내셔서 크고 작은 화분이 올해만도 몇개나 늘어났다. 원래 있던 화분들도 많이 자란 건 다 분갈이까지 해주고...

 

작년 가을 산책나가셨던 왕비마마가 낑낑대며 사들고 올라오다 결국 나에게 전화로 sos를 쳐서 '구박'을 받았던(아니 왜 무거운 거 들고 다니며 사서 고생이시냐고!) 제라늄 화분엔 흙도 더 덮어주고 영양제도 꽂아주었더니 꽃이 몇달째 어마어마하게 계속 피어나고 있다. 이에 고무된 왕비마마, 그간 사다먹은 딸기 스트로폼을 차곡차곡 모아두더니 깻잎을 키우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어디서 깻잎 씨앗을 받아둔 게 있다나 뭐라나.

 

그리하여 왕비마마는 크고 작은 스티로폼에 흙을 담아 들깻잎 씨앗을 심어 양지바른 담장 밑에(라일락 나무 옆에) 내다놓고는 며칠에 한번씩 물을 주며 근 한달을 기다렸다. 과거에 아버지가 한식 성묘 다녀오며 굳이 화원에 들러 깻잎이랑 고추, 상추 모종 사다가 베란다에서 키울 때는, 쌈채소 만원어치 사다먹는 게 차라리 낫지 그게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타박만 했던 왕비마마가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 그러나 노상 들여다보아도 깻잎 씨앗에서 통 싹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 문제. 그간 날씨가 또 좀 추웠나말이다. 검정 비닐을 씌웠어야하는 게 아닌가, 개토를 너무 얇게 했나, 온갖 걱정을 다 하셨다.

 

송추 집앞에다 매년 텃밭을 가꾸는 막내고모도 모종을 사다가 심는다는데 씨앗부터 키우는 건 원래부터 말이 안되는 거였다고 왕비마마를 달래며, 정 싹이 안나면 작년에  길가에서 받아다 놓은 분꽃 씨앗을 대신 심겠노라고 내가 선언했다. 그러고는 얼른 '분꽃 씨앗 파종'에 대해서 검색을 해보니 4월 말에 심으라고 나왔다. 그것도 하루 물에 불렸다가.

 

의기양양하게 포스트잇에 적어 탁상달력에 붙여두었는데 어영부영 정신없이 일에 치여 지내다보니 이미 5월이지 뭔가. 어제에야 비로소 알량한 분꽃 씨앗 다섯 알을 물에 불려놓았다가 오늘 내려가 깻묵냄새가 나는(들깨 씨앗이 썩었나??) 스티로폼 화분에 심어놓고 올라왔다. 설마 분꽃 씨앗은 싹을 틔우겠거니 기대하고 있는데, 왕비마마는 아직도 희망을 안버리셨다. 원래 들깨 싹이 오래 걸린다고 들었단다. 한달은 되야 한다니 이제 곧 나올 거라고...

 

어랏, 나는 것도 모르고 흙을  마구 헤집어 놓았는데, 깻잎 씨앗이 싹을 틔울 준비중이었다가 청천벽력을 맞은 건 아닐까나. ㅋㅋ 어쨌거나 까마득한 옛날 할아버지댁 살던 시절 화단 가장자리에서 해마다 핀 분꽃은 일일이 씨앗을 심은 게 아니라 저절로 떨어진 씨앗이 겨울을 나고 다음해에 또 다시 싹을 틔운 거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니까 깻잎 씨앗보다 분꽃 씨앗이 더 생명력이 탁월하리라는 것이 나의 주장.

 

왕비마마는 일주일 쯤 더 기다려보다가 그래도 깻잎 싹이 안나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모종을 사다가 심어야겠단다. 일주일 기다리는 동안 과연 분꽃은 싹을 틔울 수 있을까. 그 옛날 강낭콩 관찰일기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괜히 기분이 좋다. 그러면서 속으로 큭큭 웃음이 난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보다. ㅠ.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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