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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미투

아픈 손가락 2020. 4. 20. 18:27

Me too는 '나도 당했다'가 아니라 '나도 말한다'는 의미라고 여성계에서 암만 말을 해도 여전히 언론에선 미투 옆에 괄호 치고 '나도 당했다'라고 적혀 있다. 아무튼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이 땅에 살면서 공공장소의 불법촬영 위험과 성추행, 성희롱의 경험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은 0%일 거라 확신한다. 너무 흔해서 오히려 황당하고 차라리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어 속으로 삭히고 지나간 수많은 상처들.

얼마전 총선을 앞두고 팔순 노모에게 연동형비례제 정당은 어디를 뽑을 예정인지, 어디를 뽑으면 좋겠는지 의논하는 과정에서 N번방에 관해 설명을 드렸다. 파렴치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성범죄자놈들의 행태와 피해자들의 고통, 언론과 일부 인간들의 2차 가해... "그러길래 좀 조심하지" 따위의 말들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가해자 중심 언사인지. 그러다가 문득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오래 전 나의 상처가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물었다. 그 옛날 북가좌동 할머니댁에 살 때 우리 이웃에 살던 까까머리 남자애 이름이 해중이 맞아? - 해중이? 아... 정O 동생? 엄마는 종종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도 까먹으면서 놀랍게도 옛날 일은 귀신같이 기억한다. 

사실 해중이라는 이름은 나도 요번에 처음으로 기억이 난 거다. 그냥 까까머리 시커먼 얼굴, 더럽고 꾀죄죄한 차림새와 히죽거리는 기분나쁜 웃음, 그리고 뭉뚱그려진 얼굴로만 막연히 기억되는 걸 애써 지우곤 했는데 어쩌다가 퍼뜩 그 이름이 떠올랐을까. 암튼 욕쟁이가 된 지금 난 엄마에게 말했다. 5살 때인지 6살 때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해중이 그 새끼가 나한테 엄청 나쁜짓을 했다고. 그간 애써 지우려고 했던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중학생 정도 되었던 그놈은 우리 할머니댁의 안방과 건넌방 사이 거의 창고처럼 쓰이덧 마룻방 깜깜한 공간에서 어린 나의 속옷을 벗긴 뒤, 손으로 성추행을 했고, 무섭고 아파서 우는 내게 그 사실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말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었다. 당연히 나는 그 이야기를 당시는 물론이고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냐고? 그리고 이제 와서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땐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을 테고, 창피해서 숨겨야할 일이라 느꼈을 테고, 놈의 협박이 무섭기도 했겠지.... 이름도 기억 못하는 그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나 역시도 그냥 없었던 일로 덮어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초등학생 때 명절에 한복을 입고 온 가족이 버스를 타고 외갓집에 다녀오던 길, 버젓이 아빠엄마가 옆에 서 있는데도 어떤 나쁜 인간이 공단 한복을 입은 열살 무렵의 내 엉덩이를  쓰다듬던 손길을 느끼고도 얼어붙어 아무말 못했었다고, 그 옛날엔 왜 그렇게 성추행범들이 많았는지, 왜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곧바로 부모에게 이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지금 같으면 소리를 질러 피해 사실을 알리고 경찰서로 버스를 몰아 (소매치기범이 있는 경우 옛날엔 정말로 기사 아저씨가 버스 문 안 열고 곧장 경찰서 앞으로 버스를 댄 적이 있었던 걸 경험한 바 있다) 현행범으로 놈을 잡아 처넣었을텐데 말이다. 그뿐인가, 대학 신입생 때 버스에서 성기노출범을 만나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과 둘이 손잡고 엉엉울었던 기억까지 다시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출몰하던 온갖 성범죄자들이 이제는 화장실과 지하철에서 불법촬영을 일삼는 것에서 벗어나 무고한 피해자들을 성노예로 만들고 그 영상을 돌려보는 끔찍한 지경에 이르른 것이 N번방의 실태이니, 반드시 성범죄자 관련 처벌법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를 뽑아야한다는 것이 나의 요지였는데... 모녀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 혐오스럽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겼다고 생각되어 실제 내용은 접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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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엄마도 그런 일이 있었어... 두 번이나. 

열살쯤 됐던가, O동 국민학교 다닐 때 동네 뒷산에서 노는데, 어떤 남자가 맛있는 걸  사준다며 따라오라고 하길래 멋 모르고 따라갔더니 그 남자가 으슥한 곳에서 바지를 훌떡 내리더니 '내 고추를 먹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놀라서 도망쳤는데, 따라간 자기가 잘못했다 생각해 울 엄마도 결국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단다. 무려 70년 만에 처음으로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런 일은 한번 더 있어서, 한국전쟁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던 시절--40년생인 엄마는 부산에 열린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군무원 고모부의 말을 믿고 가족은 서울에 둔 채 혼자서만 먼저 부산으로 갔었고 학교는커녕 못된 고모의 학대를 받으며 11-12살에 고모네집 식모 노릇을 하며 굶주렸던 일이 있다고 다른 포스팅에서 밝힌 바 있다--아이들에게 초콜릿과 사탕 따위를 던져주며 선심쓰던 유엔군 중 하나가 또 다시 어린 엄마를 초콜릿으로 유인한 뒤 성기를 노출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영국군인'이라고 정확히 국적까지 알고 있고, 그 뒤로는 외국인  남자들만 보면 도망을 다녔단다. 지금도 성범죄자들은 전세계적으로 어디나 존재하지만, 전쟁통에 남의 나라에 와서도 아이들을 성추행하는 범죄자들이 군인으로 파견되었다니 끔찍하다. 60년대 베트남에 참전한 한국군 중에도 그런 성범죄자들이 수두룩했을 것 같다. 아무튼 엄마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그런 얘기를 어디 가서 하겠니, 창피하게.' 엄마잘못이 아니라니깐요! 역시나 그 일은 엄마가 70여년간 비밀에 붙여둔 또 하나의 끔찍한 기억이었다. 

성추행, 성폭행의 피해자는 생존자이기도 하므로... 나도 더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저 다치지 않고 잘 빠져나왔으면 된 거라고, 그 새끼들이 용서 못할 변태성욕자, 소아성애자, 성기노출범, 성범죄자들이라고, 지금 같으면 경찰에 신고해 감방에 쳐넣었어야 한다고 한참 열을 올리며 욕을 해댔지만 그런다고 엄마의 오랜 상처가 단숨에 치유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엄마도 의아해하셨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전 일인데 그놈들이 입었던 옷 색깔까지 기억이 난다면서...

엄마, 그런 걸 트라우마라고 하는 거예요. 너무 끔찍한 기억은 뇌에 상처를 깊이 새겨놓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아요... 나 역시 그 해중이 새끼를 비롯해 성추행범, 성기노출범 때문에 꾸었던 악몽이 얼마나 많았던지 새삼 몸서리가 쳐졌다. 

 

내가 해중이라는 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촉발된 엄마의 미투 고백을 듣고 보니, 나는 또 궁금해졌다. 70년간 말하지 못했던 성추행의 상처와 자책 역시 결국 엄마의 조울증에 원인이 된 건 아닐까. 원래 울 엄마의 성격은 마음에 있는 이야기는 다 터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쪽이시라던데, 엄마 고교동창생들의 증언을 들어보아도 싸우면 곧장 편지로든 대화로든 풀어버려야지 며칠간 말 안하고 꽁하고 있는 건 절대 못참는 사람이라시던데...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반복되었던 그 끔찍한 기억을 꾹꾹 파묻고 눌러놓았다면...  ㅠ.ㅠ

전문가가 아니어서 나로선 그냥 그때 그 사건은 어린 시절의 엄마 잘못이 절대로 아니에요, 나쁜 놈들이 그때도 너무 많았고 아직도 너무 많아요. 그러니깐 이제 더는 그런 일 일어나지 못하도록,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기면 제대로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도록 우리가 다 같이 노력해야 해요...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만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일단 엄마도 나도 그 옛날의 성폭행 피해를 외부로 '발화'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단계라고 믿는다. 여기에나마 내가 그 개만도 못한 새끼 해중이란 놈의 욕을 쓰면서 제대로 단죄의 욕구와 치유가 시작됨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주 초 투표를 하기 직전, 나는 이러저러한 의미로 37개나 되는 비례대표 정당 중에서는 정의당 아니면 여성의당을 찍으시는 게 좋겠다고 추천했었는데... 엄만 과연 그 기다란 투표용지 어디쯤에 기표를 하셨을까. 그간 수많은 어이없는 판결과 솜방망이 처벌을 먹고 자란 N번방 사건수사 과정을 더더욱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도 엄마도 확고하다.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아야 옳으니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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