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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삶꾸러미 2007. 8. 6. 17:33
마음에 깊이 남은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포도원과 텃밭 가꾸기로 다스렸다는
어느 저자의 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그 책 옮긴이의 말에도 썼지만
그 책을 작업하는 사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어떤 위로의 말로도 섣불리 위로가 되지 않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자연 속의 명상으로 달래는 지은이의 시도에 나도 크게 공감할 수 있었기에 그 책은 (표지와 장정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지금까지도 꽤나 애착이 간다.
물론 나야 집안에 들인 작은 화분조차 죽여버리기 일쑤지만
대지와 초록 식물들의 생명력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며,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자연의 순환고리와 섭리도 어쩐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어젠 서울 근교에서 텃밭을 일구며 사시는 외삼촌 댁엘 다녀왔다.
토마토며 오이, 가지가 너무 많이 열렸으니 바람 쏘일 겸 엄마 모시고 한 번 다녀가라는 외삼촌과 숙모의 당부에 못이기는 척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간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수분이 너무 많아진 탓에 바알갛게 익은 토마토는 가지에 매달린 채 쩍쩍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터져버린 크고 작은 토마토를 따다가 마당 수도에 씻어 그대로 입에 넣으면
토마토도 이렇게 달콤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20년째 농약이며 비료를 쓰지 않았다는 외삼촌의 텃밭에선 용케도 채소들이 튼실하게 자라나고 있었는데, 텃밭 가장자리의 감자 줄기를 잡아당겨 삽으로 땅을 파내니 알알이 열린 감자와 함께 드러난 지렁이들이 사방에서 꿈틀거리며 달아났다.
다른 벌레 같으면 나 역시 징그럽다고 소리지르며 달아났겠지만 지렁이는 대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착한 일꾼이란 걸 익히 들어온 때문인지 제법 빠르게 제 구멍을 찾아 들어가는 지렁이까지 감탄스러웠다.
다음주 정도면 토마토를 모두 뽑아버리고 무를 심어야 한단다.
아직도 초록색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토마토가 많던데 아까워서 어찌 뽑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농사란 것이 그렇게 다 때를 맞춰 심고 가꾸고 뽑아버리고 또 가꿔야 하는 게지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어제 바리바리 싸주신 토마토와 옥수수, 감자, 늙은 오이, 햇오이가
삐죽이 얼굴을 내민다.
어제는 조카들과 텃밭을 쏘다니며 잘 익은 토마토와 오이를 따고, 또 먹는 것으로 고문을 당하다시피 오후 내내 먹어대느라 마음과 몸이 풍요롭다못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는데
냉장고 그득한 텃밭의 선물을 보노라니 오늘까지도 마음의 풍요와 너그러움이 쉬 가시질 않는다.

그리고
생명의 신비가 넘치던 어제 그 텃밭의 밭고랑을 돌아다니며 맡은 흙냄새가 떠올라
또 다시 마당 넓은 집에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비록 잡초로 우거진 마당에 살게 되더라도 작은 텃밭 일구며 흙냄새 맡으며 살고프다.
그러면 내 뾰족함과 까칠함도 훨씬 뭉뚱그려져 선하게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마당 넓은 집의 꿈을 향해 조금이나마 다가가기 위해서라도
제발 일 좀 하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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