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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앞 추억

추억주머니 2008. 8. 13. 17:05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좀 샀더니 뜻밖의 부록들이 딸려왔다.
5천원짜리 국제전화카드와 홍대앞 클러빙 맵.
책 홍보를 위해 지도를 비매품으로 제작해 돌리는 출판사도 별로 마음에 안들지만(나도 두어 권 책을 내긴 했어도 다시는 거래하기 꺼려지는;;) <클러빙 맵>이라는 제목부터 눈쌀이 찌푸려진다.
clubbing map이라니. 곤봉으로 후려치는 지도라는 뜻이냐 뭐냐!  (club은 night club의 준말이기도 하지만 '곤봉', '곤봉으로 때리다'의 뜻도 있다)
그냥 '홍대앞 클럽 지도'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말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 쓸데없이 아무데나 영어를 같다붙이는 세태는 아무래도 못마땅하다.

어쨌거나 홍대앞 클럽과 카페, 음식점 따위가 깨알같이 적혀 있는 지도를 시큰둥하게 들여다보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주말마다, 때로는 주중에도 밤마다 홍대앞으로 몰려가 맥주캔 하나에 몇 시간 동안 열광하던 10년 전의 추억이.
그때도 이미 난 30대였는데 어디에서 그런 체력과 열정이 나왔는지 원.
지금 생각하면 의아하고 신기하다.

나와 지인들을 한꺼번에 홍대앞 클럽으로 이끈 건 학원에서 만난 어느 후배였다.
요즘처럼 인터넷 검색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므로, 번역하면서 가끔씩 나오는 슬랭도 물어보고
녹슨 영어실력도 닦을 겸, 그리고 어떻게든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되찾아보겠다고 열심히 영어학원엘 다니던 시절이었다. 학원 사람들 가운데 몇몇과 놀랍게도 죽이 잘 맞아선 수업 끝나고도 헤어질 생각을 않고 같이 점심 먹고선 '스터디' 한답시고 온종일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다 저녁에 직딩파들이 퇴근후 합류하면 맥주마시러 돌아다니느라 연일 일은 팽개치고 놀기만 했었는데, 똑같은 놀이문화에 식상해질 무렵 휴학중이던 한 아이가 홍대앞 클럽엘 가자고 했다.
술도 안 마시는 그 아이는 주말마다 스트레스 풀러 친구들이랑 홍대앞 클럽을 가는데, 우리 분위기로 봐서 다들 좋아할 것 같다나. 그 아이가 데려간 클럽은 인디밴드들이 라이브 공연을 하는 곳이 아니라, 디제이가 음반을 틀어주되 나이트클럽과는 달리 기본도 없고 입구에서 두당 5천원을 내면 무조건 캔맥주 하나를 주는데, 그걸 마셔도 되고 다른 음료수로 바꿔마셔도 되는 요상한 시스템의 별천지였다. (나중엔 입장료를 따로 내면 음료권을 주고 팔목에 도장을 찍어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내가 첫발을 디딘 홍대앞 클럽의 이름은 <황금투구>.
내 경우 워낙에도 대학시절부터 직딩시절까지 춤추러 다니는 걸  좋아했었지만, 어느 순간 나이트클럽은 춤을 추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는 짝짓기와 즉흥만남을 위한 장으로 변질되어 춤판에 발을 끊은지 오래였다. 그런데 앉을 자리도, 가방을 놓을 자리도 별로 없이 다들 제 흥에 겨워 춤을 추거나 한 구석에서 음악에 심취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유로운 그 공간이 나에겐 얼마나 파격적이고 마음에 들던지, 우리는 금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번씩은 꼬박꼬박 홍대앞으로 달려갔고, 대부분 맨정신에 열심히 춤을 추어대거나 디제이가 틀어주는 음악에 열광하며 행복해했다. <황금투구>엔 음악을 아주 잘 틀어주는 디제이가 몇명 있었는데, <황금투구>가 자리를 옮기고 또 다시 <명월관>으로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 그들을 따라 약간은 무서운(마약을 하는 아이들도 드나든다는 소문이 도는 아주 외진;;) 클럽에 갈 때도 있었는데 결국엔 <명월관>과 <발전소>, <조커>, <흐지부지-원래는 Hodge Podge인데 우린 흐지부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오래 전 영어강사들이 마약을 하다가 대거 체포되기도 했던 이름 까먹은 클럽을 전전했던 것 같다.
홍대앞 클럽에서 춤추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처음의 일행들 말고도 주변 지인들을, 심지어는 송년모임에 나를 불러낸 거래 출판사 사람들까지 홍대앞에 데려가 춤바람을 일으켜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는데, 시커멓고 거칠고 조악한 클럽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춤바람에 물드는 이들도 꽤 됐다.
그땐 정말이지 주말에 지인들과 다른 동네에서 약속을 했다가도 그들을 꼬드겨 홍대앞으로 데려가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

하지만 클럽 음악도 변하기 마련이니, 온갖 종류의 폭발적인 음악들을 전부 들을 수 있었던 클럽들은 어느틈엔가 테크노음악에 점령당했고, 나는 죄다 그 음악이 그 음악 같은 테크노 리듬에 싫증을 느껴 춤바람(?)도 차츰 수그러들었다. 더욱이 언제부턴가 홍대앞엔 버릇없고 거칠고 아는 영어라곤 욕밖에 없는 듯한 미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는데, 그들과 보란듯이 팔짱을 끼고 나타나는 야시시한 옷차림의 예쁜 여자애들이 비비적비비적거 리며 추는 춤도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얼마 후 미군 범죄 사건 때문에 홍대앞 클럽에선 미군들의 출입을 거부하는 운동도 벌어졌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전혀 모르겠다)
라이브 공연을 하던 <드럭> 같은 클럽으로 장소를 옮겨보기도 했지만 한번 시든 춤바람은 좀처럼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즈음에 양현석이 대규모로 오픈한 힙합 클럽도 생겨나 가끔 연예인을 구경하는 재미라도 보자는 지인들에게 이끌려 <NB> 같은 클럽에도 가봤지만 만 2년을 정점으로 결국 나(와 지인들)의 가열찬 클럽 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열심히 홍대앞을 찾아다니던 때는 98년과 99년이라는 의미인데, 그 뒤로는 가끔 클럽엘 가도 곡 하나를 끝까지 추기에 체력이 딸릴 정도였고 한때 그토록 열광했던 '춤' 자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후 홍대앞을 가는 일은 훤한 대낮에 근처의 출판사를 방문할 때나, 약속을 만들어 엄청나게 생겨난 카페와 술집 따위를 찾을 때뿐이고 클럽에 가고싶다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약속이 있거나 볼일이 있어 홍대앞을 찾게되면 아직도 옛추억이 떠올라 비싯 웃음이 나고 마음이 설렌다. 이제는 골목골목 빈틈없이 들어찬 술집들과 카페가 약간 숨막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홍대앞엔 뭔가 다른 공기가 떠도는 것 같다. 하나의 틀로는 도저히 정돈할 수 없고 막무가내로 제 목소리를 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개성의 동네랄까. 나만의 착각이자 편견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홍대앞엘 나가는 기분은 언제나 그럴듯하여 행복에 가깝다.

그리고 오늘 마침 홍대앞에서 약속도 있다!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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