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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따리 2009. 2. 5. 23:05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주변 어른들에게 퍽 인상적인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면 세 가지 화제를 금하라는 것.
정치, 종교, 출신지.
시국이 어지러웠던 대학시절 정치는 곧 현실인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직장인으로 탈바꿈한 순간 정말로 정치 문제는 어디서든 섣불리 꺼내드는 순간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나타내거나 끝없고 피곤한 논쟁을 일으켰다.
종교와 출신지 문제도 마찬가지. 드디어 호남 출신의 대통령이 배출되긴 했어도 여전히 뿌리 깊은 지역감정은 쉽사리 치유될 수 없는 뜨거운 감자 같은 느낌이었다.
종교색이 그리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미국회사라며 누군가 재치기를 하면 옆에서 꼭 "Bless you!"(신의 가호를 빈다고??)라고 해주어야 예의바른 것이라는 양 행동하는 직원들과 한국말을 하다가도 걸핏하면 "Oh my God!"이라고 추임새를 넣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일년에도 몇번이나 엄마따라 절에 간다는 사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세 가지 금기는 아직도 쓸모있게 통용되는 대인관계의 비법인 것도 같다. 섣불리 상대방을 설득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같은 입장이 아니고선 상대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우니까.
특히나 종교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불교니, 천주교니, 기독교니 선택을 하기는커녕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애매한 불가지론자인지도 정립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언젠가 내 블로그에 들렀던 막내동생이 "누나 요새 너무 정치적인 거 아니야?"라고 언급해서 뜨끔했을 정도로 
가끔 이곳에 못마땅한 정치에 대한 나의 푸념을 늘어놓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약간은 조심스러우며,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괜히 금기를 깨뜨린 건 아닌가 염려스럽다. 
그러지 말아야지 내심 다스리고는 있지만, <너무>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심히 드러내는 언사를 일삼는 사람을 보면 나는 덜컥 인간적인 실망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에게 종교란(특히 대부분의 기복종교) 냉철한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합리의 궁극이라 생각되는데, 또 남들은 이런 나의 <비인간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에 새삼 실망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언제부턴가 모든 종교가 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이 여겨졌고 몹시 못마땅했으며, <종교의 자유>를 앞세워 휘두르는 <종교인>들의 권력과 횡포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의 배타성과 일부 인간들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결국 종교 역시 인간들이 필요 때문에 만들어 낸 제도일 뿐이니 종교 자체에 대해서 좋고 나쁨의 판단을 내리는 것도 내 자유라는 결론에 어렵사리 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서 금기라는 저 세 가지 주제의 구속을 너무 심하게 받은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나마도 얄팍한 지식이나 견해로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나마 있는 정치나 출신지 문제와 달리 신앙과 신의 영역은 워낙 아는 것이 없는 터라 더더욱 피해야 할 부분이었다.

대체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신앙에 동조할 순 없지만, 각 종교의 배타성에 물들지 않은 공평무사한 교양인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엄마 따라 절에 가면 부처가 신인지 아닌지 고민없이 그냥 예를 올리는 차원에서 기도와 절을 했고, 친구 따라 교회나 성당에 가게 되더라도 그들의 신을 믿는다기 보다는 역시 존중과 예의 차원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얄팍하나마 현대 교양인으로서 보여야 할 관용이 아닐까 하면서.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 있다면 혹시 모르니깐 기도는 해보지 뭐. 신실하지 않다고 내 기도는 안들어줄 옹졸한 신이라면 까짓것 나도 상관없어. 싫음 말고!" 정도의 속셈이었달까.

그러던 차에 TV를 보다가 알게 된 책이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김영사)이었다.
2007년엔가 KBS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졌는데(아쉽게도 내가 애청하던 이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은 최근 폐지됐다) 신의 존재 유무를 하나의 가설로 접근하는 과학자의 논증 방식이 흥미로워 보였다.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작심했던 이 책은 일단 책값이 비싸 매번 온라인 서점에서 쇼핑카트에 담았다가 슬며시 빼놓기를 반복하다가는 우선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는데, 속 표지를 넘기자마자 적힌 글귀부터 쿡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 로버트 퍼시그 -

 맞아, 맞아... 그러면서 읽던 책은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중간에 내가 게으름을 부려서;;) 독촉을 받아 도서관에 반납해야 했지만, 작년 말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주목할 만한 책인가로 다시 소개된 걸 보고는 마저 읽어봐야겠다 싶기도 하고, 내가 몸소 읽어본 바로도 소장해서 두고 볼 값어치를 한다는 결론을 내려 정가 25000원이라는 거금임에도 결국 사들이고야 말았다.
(역시 나는 정말 북리뷰를 못쓰는 게 맞다. 이건 뭐;; 책 구매의 역사도 아니고;;)

리처드 도킨스 본인도 이 책은 신은 있다고 철저하게 믿는 신앙인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중간한 입장에서 섣불리 속마음을 밝히지 못하는 이들을 목표 독자로 삼는다고 밝혔다는데, 신은 반드시 있다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는 사람들이라면 <신은 없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지은이의 과학적 논증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유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 즉 모든 세계의 지적인 설계자로서의 신, 초자연적인 지성으로서의 신은 없다는 <과학자> 도킨스의 주장은 나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냈다.
그 이유는 내가 종교보다 과학을 더 진리를 찾는 도구에 적합하다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이 내게 더 믿음직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치밀한 검증을 추구하지만 스스로 오류나 실패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리가 우리 믿음을 확인하게 위해 주도면밀하게 실험적으로 되짚어 보다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기꺼이 믿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각주:1] 황 모 박사가 인간의 야망 때문에 사기극을 이어갈 때 거짓을 밝혀낸 이들 또한 과학자가 아니었던가. 심지어 세계적인 지성 호킹 박사도 연구를 거듭하다 자신의 과거 이론에 오류를 발견하면 순순히 인정하고 이론을 뒤집기도 한다. 100퍼센트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현재까지 오류라고 알려진 바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학이므로, 오히려 오류없는 진리와 가치를 지닌 종교보다 못미덥다는 시각도 당연히 존재하지만 꼼꼼한 검증과정을 거쳐 진리라고 <인정된> 수많은 과학적 가설들이 내겐 인류의 초베스트셀러 <성경> 글귀보다 진정성을 갖는다. 지구가 둥글다는 <미친> 가설이 오랜 과학 검증의 역사를 거쳐 급기야 우리는 우주선에서 찍은 동그란 지구의 사진을 보아 진리로 알고 있듯이,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허무맹랑한 가설이 아니라 확고한 증거를 갖추어 진리로 입증되었음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오래 전 그랜드캐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전직 사회 교사였으리라 의심할 할 정도로 쓸데없이 박식했던 여행사 가이드는 그랜드 캐년의 실물을 보여주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그랜드캐년의 사계와 생성역사 따위를 담은 영상물 상영관으로 몰아 넣었다. 입체 안경을 쓰고서 마치 실제로 헬리콥터를 타고 협곡 사이를 지나는 양 그랜드캐년 곳곳을 구경하고 난 뒤 드디어 관광 포인트에 사람들을 풀어놓았을 때, 나는 아득히 보이는 드넓은 협곡과 단층의 모습을 보며 퍽 담담했다. 
수십만년(수백만년이던가?) 동안 변한 지표면의 모습이 장엄하기는 했으나, 그것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이자 시간이 만들어낸 마술 같은 현실이라 의심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른바 순진한 기독교인들이었는데 그랜드캐년의 가장 넓은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서서 어느 부부는 손을 맞잡고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행하실 수밖에 없는 기적의 현신이라고 말했다. 조금 전 나와 똑같은 영상물을 본 이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은 겹겹이 쌓인 단층이며 어마어마한 협곡의 깊이가 도저히 <단순한> 지층 부식의 결과일 리 없다고 나를 설득하려 들어 난감했다.
 
내가 보기엔 <만들어진 신>을 읽는 이들의 입장도 그랜드캐년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다윈주의를 출발점으로 하는 논증의 기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과학의 시각에서 도킨스의 논증을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종교인의 입장에서 분개하거나.
아무려나 나는 인간이 신을 믿는 게 아니라 <믿음을 믿는다>는 지은이의 주장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상엔 수많은 종교인들과 신을 연구하는 무수한 신학자들이 있어 마치 신의 존재가 당연한 것 같으며,
내 주변에도 직접 신의 목소리로 기도의 응답을 들었다는 신실한 이들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신이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데 방점을 찍어왔고
그 방점을 좀 더 진하게 만들어주는 데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기여했음은 인정할 수 있다.

존레논의 노래처럼,
천국도 지옥도 국가도 종교도 없다면 인류는 훨씬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니깐 그래!

(그나저나 원제는 The God Delusion이다. delusion은 망상의 뜻. 원제가 더 충격이라 <만들어진 신>으로 다듬어진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 더 훌륭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만들어진 전통>의 아류작 같기도 하다. 나 같으면 번역하며 가제를 어떻게 붙였을지 한참 고민하다 머리아파져 관뒀다. 독자로서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더러 번역하라고 했더라면 멀미 깨나 하며 머리칼을 쥐어뜯었겠다. 그야말로 과학 <전문> 번역가이신 옮긴이가 존경스러울 따름) 
  1. [자오선 여행] 16쪽, 쳇 레이모 지음, 사이언스북스 [본문으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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