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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치기

투덜일기 2009. 3. 8. 17:34
몇그루 되지도 않는 나무이건만 2년간 방치했더니 작년 여름 집앞 꼴이 완전 밀림스러웠다.
집이 나무로 가려져 골목어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건 나('진짜' 마당 있는 집을 꿈꾸는 자)로선 괜히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키큰 나무가 서로 맞닿아 하늘을 가린 건 멋져보일지 몰라도 입구에 선 작은 사철나무와 라일락이 서로 가지를 이어 놓은 건 흉가 느낌이 났고, 작년에 앵두가 열렸을 때 보니 가엾게도 너무 길게 자란 가지가 무거워 비가 올 땐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쳐졌다. 게다가 나뭇가지가 무성하면 여름에 모기들이 어찌나 많이 꼬이는지!
더욱이 내가 제일 꼴보기 싫어하는 무궁화 나무는 엄청나게 가지를 뻗고 자라, 여름 내내 세차도 잘 안하는 내 차에 더럽게 뭉쳐 떨어지는 꽃뭉치를 퍽퍽 뿌려댔다. 원래도 무궁화꽃 예쁜 줄 모르겠고, 벌레꼬이기 대장인데다 심지어 차위에 떨어져 누렇게 썪는 꽃뭉치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무궁화나무는 예전부터 내가 아버지한테 확 베어버리시라고 요구했던 나무다.
해서 올해는 봄되면 꼭 가지치기를 해야지 마음먹고, 가지치기의 적당한 시기도 인터넷으로 검색해놓았었다.
가장 중요한 앵두나무의 경우는 2월말에서 3월초에 꽃눈 나기 전에 하는 거라고.
2월말엔 워낙 노느라 바빴기 때문에 3월초에 하지 뭐,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일주일을 다 보낸 어제 며칠을 별러 잡은 날이었기에 전정가위와 톱을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우리집 앵두나무는 심한 편은 아니지만 약간은 해걸이를 한다. 한해씩 번갈아가면서 앵두가 많이 열리고 덜 열린다는 얘기다. 재작년 앵두철은 워낙 경황이 없었던 터라 기억나질 않는데, 작년엔 가지치기도 하지 않았는데 앵두가 정말로 많이 열렸다. 그나마도 다 따먹기 전에 엄마의 입원으로 다 말려버렸지만 말이다.
과실나무들이 다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무학(?)을 전공한 막내동생에 따르면 원래 초봄에 가지치기를 해줘야 열매가 많이 맺힌단다. 어차피 열매는 나무들이 후세를 남기기 위한 몸부림이라, 가지치기를 하면 자기가 죽는 줄 알고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얘기. 그걸 노리고 가지를 잘라버리는 인간들의 심보가 끔찍하긴 하지만 아무렇게나 뻗어 길어진 가지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내가 가지치기의 요령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니니, 막상 나무 앞에 서긴 했어도 막막했다.
작년에 읽은 책의 구절을 염두에 두긴 했었다.

가지치기를 할 때 절대로 무턱대고 가지를 잘라선 안된다. 우선 부러지거나 죽은 가지를 먼저 잘라낸 다음 웃자란 가지를 잘라주는데, 이때는 반드시 눈의 위치를 파악하고 눈 바로 위를 눈의 반대방향이 되도록 사선으로 잘라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빗물이 눈속으로 들어가 얼거나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오경아, <소박한 정원> 121쪽)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언제나 난감할 만큼 거리감이 있다. 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어느 눈의 방향을 확인하란 말인지? 가지가 단단해서 전정가위로 잘 잘리지도 않는데 사선인지 직선인지 신경쓸 겨를이 어디 있나? 톱으로 우툴두툴 자르는 건 절대 안된단 말씀?
젠장. 내 마음대로 손길 닿는대로 <무턱대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작년 초여름에 심하게 늘어졌던 기억이 있는 앵두나무의 긴가지들을 우선적으로 잘라내며 보니 아뿔싸, 이미 꽃눈이 다 돋아났더라. 분홍색 기운이 완연해 보이는 꽃눈이 다닥다닥 달린 가지들을 마구 잘라내며 올해는 앵두를 맛보기 글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앵두나무는 생각보다 꽤나 단단했다. 새끼손가락 굵기도 안되는 가지들도 가위로는 잘 잘리지 않았다. 전정가위를 두손으로 잡고 힘주어 잘라도 잘 안 잘릴 정도로 단단했는데, 상대적으로 무궁화와 사철나무는 꽤나 무르더군. 앵두나무는 가는 가지에 톱질을 해도 잘 안잘라지던데, 무궁화와 사철나무는 난생 처음 해보는 가지치기 톱질임에도 슥삭슥삭 굵은 가지가 잘려나갔다.
생각 같아선 무궁화 가지들을 더 많이 쳐내고 싶었는데 신장의 열세로 손닿는 부분만 자르고 보니 나란히 서서 서로 가지를 얽고 있는 세 그루 나무들의 전체적인 꼬락서니는 꽤나 우스웠다. 그런데도 전정가위와 톱을 들고 나와 망설임없이 쓱쓱 가지를 쳐내는 내 모습이 대단히 전문적으로 보였는지 이웃분들이 나와 한마디씩 거들면서 신기해 했다. -_-a
물론 높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전체적인 나무의 모양새를 잡는 일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사다리가 집에 있기야 하지만 내가 그 정도로 나무 가꾸기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고, 금세 힘도 딸렸다. 이번엔 그저 지저분하게 뻗은 가지들을 시원하게 이발시켜 준 것에만 만족하기로 했다. 초보 나무이발사의 솜씨로 헤어디자이너 같은 스타일을 기대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어쨌거나 좁아터진 마당 한구석이 조금은 훤해져 속이 시원했다.
다만 그것도 일이라고 톱질에 힘쓴 어깨와 가위를 잡았던 오른손아귀가 오늘까지 꽤나 아프다.
아무렇게나 톱질과 가위질을 해놓은 만신창이 앵두나무에서 과연 올해는 수확을 얼마나 보려나, 그것이 궁금하다. 
그리고 어제의 교훈: 마당 있는 집에서 예쁜 정원 감상하며 살려면 우선 집을 살 돈도 많이 벌어 놓아야겠지만 꾸준히 정원 가꾸는 인력을 고용할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 정원 가꾸는 솜씨가 있는 사람을 데리고 살거나.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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