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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삶꾸러미 2010. 3. 5. 01:03

제일 많이 쓴 태그가 제일 큰 글씨로 보이는 나의 블로그 스킨에서 드러나듯이 이곳의 태그 1위는 단연 가족이다. 어쩌면 가족이란 안온한 울타리이자 동시에 나를 가두는 가시철망 또는 멍에라는 것이 내 삶의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갖고 있는 관계만으로도 무겁고 힘겨워서 내 스스로 새로운 가족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비혼의 가장 큰 이유일 테고. 어쨌거나 읽는 이들이 지겹든 말든 또 나의 가족 이야기다.

다 저녁때 외사촌동생에게 전화가 왔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 끌려갔다 생사를 모르게 된 외할아버지 이야기가 혹시 나올지 모르니 조금 전 mbc에서 하는 <후플러스> 방송을 울 엄마가 유심히 봐주셨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내 머릿속에 <할아버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분은 늘 한분이었던 터라 이제껏 이 공간에서 내가 언급했던 할아버지 역시 죄다 친할아버지셨는데, 이참에 처음으로 얼굴도 모른 채 함자로만 알고 있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광복절 즈음과 삼일절 즈음이면 어김없이 뉴스나 특집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징용조선인>이 바로 우리 외할아버지의 이름표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울 엄마가 세살 때 외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끌려가셨고 해방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온다며 마침 일본 항구에서 만난 이웃에게 당신은 다음 배로 갈 터이니 먼저 고향에 도착하면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달라셨다는데 이후론 행적이 묘연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각지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다가 고향으로 귀국하려던 조선인이 9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방송에서 우리 외할아버지의 사연과 아주 똑같은 경우를 만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부산으로 가려는 조선인들이 너무 많아 작은 연락선으론 수용이 불가능하자, 낡은 목선을 단체로 빌려타고 귀국을 시도하면서 우연히 만난 친지나 이웃에게 소식 먼저 전하고는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사연이 중복된다는 뜻이다. 풍랑에 배가 난파되었거나 오랜 뱃길에 병사하였거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일본에 남았거나 또는 귀국 길에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났거나 뱃길이 꼬여 이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붙들렸거나, 이리저리 짐작만 할 뿐 그분들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대다수 어둠에 묻혀 있다.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네 마네,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유골을 회수하네 마네, 미쯔비시 같은 거대기업의 징용 조선인 관련 기록이 20만건이나 발견되었네 마네 하는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한편으로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매번 실질적인 일의 진척은 단 한 톨도 없었으므로 언제부턴가는 다 소용없는 헛짓이라고 아예 외면하는 쪽을 택하셨다. 유골회수를 위한 진상조사 신청이라도 하려면 우리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자라는 증거서류를 내놓아야 한다는데, 해방되자마자 전쟁 통에 보퉁이 짐만 꾸려가지고 피난 내려갔다 온 집안에 그런 게 남아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과거 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셨다는 편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피난 보퉁이를 싸면서는 나라도 편지 따위 대신 귀중품과 생필품을 챙겼을 터이고 잿더미로 변한 서울에 돌아와선 우선 먹고 사느라 바빠 편지 꾸러미를 불쏘시개로 써버렸대도 당연할 것 같다. 

생사도 알 수  없고 행적도 모른 채 그저 당연히 돌아가셨으리라고 짐작하는 외할아버지의 경우, 우리 가족은 유골을 찾는다거나 더 나아가 있을지 말지도 모를 보상금을 받는다거나 하는 희망은 버린지 오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울 엄마가 세 살 때 헤어졌으니 자손들에게 얼굴도 기억날 리 없는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그저 빛 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키큰 어르신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전주이씨 XX대군파 십몇대손>임을 귀에 못박히게 들어온 사촌동생은 입장이 좀 다른 모양이다.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면 할아버지의 마지막 행적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일 게다.

사촌동생은 249명이라고 인원까지 정확히 언급된 징용조선인의 명단이라도 방송에 나올까 기대했던 모양인데, 냉소적인 생각으로 방송을 지켜본 내 짐작대로 새로울 것은 전혀 없었다. 일본 곳곳의 사찰에는 주소와 성명까지 똑똑히 기록된 재일 조선인의 유골함이 수두룩빽빽한데도, 훌륭하신 이 나라는 징용 조선인의 유골회수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국회에서 쌈박질을 해대는 동안 법안 통과가 늦어져 예산집행이 되지 않는 바람에 그나마 해마다 이맘때쯤 미미하게 이루어지려던 한일합동 조사는 무산되고 말았단다. 오히려 일본인들과 일본 사찰에서 그 오랜 세월 징용조선인의 유골함을 보관하다 더 적극적으로 한국으로 돌려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무작정 기다리며 보관하기 어려우니 담당자 마음대로 합골해서 아무렇게나 뒤섞어 놓은 곳도 있던데, 반백년이 넘도록 제 나라에서 찾아갈 생각도 안하는 남의 나라 백성 유골을 그렇게 다룬다고 해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조선으로 되돌아가다가 태풍에 난파된 배에서 떠밀려온 조선인의 시신이 엄청나게 쌓이는 바람에 손수 매장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는 일본 노인이 과거 조선인 유골 매장터라고 가리키는 대마도의 어느 바닷가엔 요즘 한국에서 흘러들어간 쓰레기 더미가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이 나라에서 징용 조선인 문제를 대하는 권력자들의 태도를 상징하는 듯한 그 쓰레기를 보고 있자니 분노도 치밀지 않았다. 다만 그 쓰레기 더미 앞에서 고인들을 위한 묵념을 올리는 일본 노인의 인간적인 마음이 고마울 뿐.

물론 징용조선인의 유골 환수 문제는 전범 일본의 배상금 책임 문제와 엮여 있고, 강제노역에 끌려간 할머니들에게 배상금이랍시고 겨우 99엔을 내미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 일본 정부의 떳떳한(?) 입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원조를 빌미로 정부차원에서 배상문제를 제멋대로 마무리한 이 나라 권력자들의 과오 탓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힘없는 나라 탓에 남의 나라에 끌려가 억울하게 노동력을 착취 당하다가 죽은 국민들의 후손이 원한다면 그 유골이라도 되찾아 이 땅에 모셔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미온적이고 알량한 태도로 90만에 이르는 징용 조선인의 흔적을 찾고 유골을 반환하려면 앞으로 몇년이 더 걸릴지 당연히 알 수 없는 일인데, 국회에 앉아 있는 놈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집행 예산 삭감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사촌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내일쯤 녀석에게 외할아버지의 흔적 찾기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전화를 할 것이다. 이 나라 권력자들은 올림픽에서 메달 따온 선수들에게는 <국격>을 높여 자랑스럽다고 플래카드 내걸고는 앞다투어 같이 사진찍고 생색내기 좋아할지 몰라도, 힘없고 돈없는 소시민들의 조상 찾기는 놈들이 보기에 <국격>이나 <국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쓰레기 더미 뒤지기로 여겨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야 굳이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아도 사촌동생 역시 방송을 봤다면, 외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이 나라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어린 시절은 대여섯 살 무렵인데, 놀랍게도 울 엄마는 세살 때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하얀 한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키 큰 남자가 자신을 안고 마당을 왔다갔다 했다는 울 엄마의 말에, 외할머니가 희안하다며 "그분이 바로 네 아버지시다"고 했다니 우리로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괜한 전화 한통에 울 엄마 역시 얼굴도 모른 채 느낌으로만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새삼 달구는 듯하던데, 혹시 외할아버지 함자가 나오는지 눈 부릅뜨고 지켜볼 터이지 걱정말고 주무시라고, 그래도 별 기대는 하지 마시라고 미리 언질은 했지만 내일 대뜸 엄마한테 화부터 낼까봐 걱정이다. 부디 "엄마는 그렇게 겪고도 아직 이 나라에 기대하는 게 있어!? 징용 끌려간 사람들 생사 확인해주려고 나섰더라면 벌써 해줬어야지!"라고 버럭 소리지른 대신 그냥 얌전하게 "우리 외할아버지 얘긴 전혀 안나오더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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