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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려받은 옷

투덜일기 2011. 10. 26. 00:56

맏이임에도 어렸을 때 물려받은 옷을 종종 입었다. 주로 네살 많은 사촌언니가 입던 옷이었는데, 한복이야 내가 워낙 명절에 한복 떨쳐입기를 좋아하는 어린이였던 터라 신을 냈지만 그밖의 옷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나일론이라서 보풀이 사방에 일고 소매를 두세번 둥둥 걷어야 겨우 손이 나오는 스웨터 같은 건 진짜 입기 싫었다! 물려받는 옷이라도 차라리 엄마옷을 물려입는 건 신나고 좋았다. 엄마가 손수 줄여주든 세탁소나 양장점엘 가져가 줄여오든 내 몸에 맞게 제대로 줄여서 예쁘게 맞춰주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옷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건 두벌인데, 아무래도 사진이 증거로 남아있기 때문일 거다.

하나는 국민학교 1학년 봄소풍때 입고 간 점퍼스커트. 옛날에 촌스러운 노인들이 산으로 단풍놀이 가면서 양복 떨쳐입듯, 내가 어린 시절 소풍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가는 게 '관례'여서 그때 사진을 보면 아래 위 정장을 입은 남자아이들, 곱게 원피스나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1년중 드물게 '사진'을 박는 날이니 당연하지! 암튼 그날 사진 속의 나도 분홍색 블라우스에 민소매 원피스처럼 생긴 진회색 모직 점퍼스커트를 입고, 풍선을 든 모습이다. 언젠가 앨범을 보다 엄마가 말해주었다. 소풍에 입고갈 새옷을 벌로 다 사입힐 돈이 없어서 블라우스만 새로 사고, 점퍼스커트는 엄마 치마를 고쳐 만들어 입혔다고. 내가 엄청 좋아했던 옷이라 블라우스 말고, 흰색 폴라티에도 엄청 입고 다녔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두번째 엄마옷 리폼은 목둘레에 인조털이 붙은 겨울 코트. 5, 6학년 겨울에 엄마가 낡아 헤진 당신 모직코트의 안감을 떼고 천을 뒤집어 만들어 입혔는데 정말 따뜻하고 우아해서 신나게 입고 다녔다. 그 코트에다 목도리를 한번만 감아 앞뒤로 늘어뜨리면 어찌나 어른이 된 느낌이던지. 아마 국민학교 졸업식날도 그 코트를 입었을 거다.

거의 대학 다닐때까지 사촌언니 옷을 계속 물려받아 입기는 했지만, 중간에는 언니가 너무 몸이 비대해지는 바람에 그게 불가능한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 내가 물려받기를 노렸던 옷은 넷째 고모와 막내고모 옷이었다. 두분 고모는 또 제일 '부자'인 셋째고모에게서 가끔씩 옷을 물려받았는데, 그런 옷들이 내 눈엔 또 어찌나 멋져보이던지. 6학년쯤 되어보이는 어린시절 사진을 보면 어깨부분이 너무 넓어 어른 옷이 분명한 빨간색 페이즐리 무늬 공단 재킷을 소매만 잘라 좋다고 입고 웃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하기야, 9살 차이나는 막내고모는 계속 내 우상이었으니까. 고모가 좀 작아졌다며 프린트 티셔츠라도 한장 주면 기분이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언제부턴가 정민이는 나와 체격이 비슷해지자 자꾸 내 옷을 노렸다. 핑계는 있었다. 계획없이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자고가게 될 때 입을 옷이 없다는 것. 그럴 때면 녀석은 편한 티셔츠는 관두고 과거의 나처럼 꼭 어른스러운 옷을 직접 골라 입고갔다. 티셔츠 원단으로 만들어졌으나 실은 정장용인 셔츠 같은 것. 고모 옷이 자기한테 맞는다는 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고모가 입기엔 '너무 귀엽다'면서 후드티도 뺏어가고, 어떤 옷은 그냥 빌려가는 거라더니 돌려주지 않았다. -_-;

그러던 것이 올봄을 기점으로 중단되었다. 이미 키는 나보다 커진게 작년 초였으나 워낙 조카가 가늘가늘해서 체격은 얼추 비슷하더니 올해들어 쑥쑥 크고나선 어깨도 나보다 한뼘은 넓어진 것 같고 팔도 엄청 길어졌다. 녀석의 최대관심사가 다이어트가 될 만큼 살도 붙었음은 당연하다. 이젠 웬만해선 내 옷을 빼앗아입을 수 없게 된 것! 며칠 전엔 조카가 자기 옷장을 열어보라니 이제 자기한테 작아져 입을 수 없는 옷들을 넘기겠다고 했다. 고모한텐 맞나 그거랑 그 하얀 거 입어봐, 고모. ㅠ.ㅠ

결국 나는 정민이가 나한테서 빼앗아 가거나 무단으로 빌려갔던 옷들과 함께 작아진 조카의 옷을 한 무더기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카들이 쑥쑥 크는 바람에 옷뿐만 아니라 운동화랑 인라인 스케이트 같은 거 물려입고 신는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가끔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고 보니 기분이 아주 묘하다. 내가 자기 옷 입고 있는 거 보면 녀석은 또 얼마나 잘난 척을 해댈까나. 쳇.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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