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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유감

투덜일기 2010. 9. 2. 15:40

초등학교 앞 문방구의 최고 인기품목이 하나에 이천원짜리 커플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나는 줄곧 어여쁜 조카 공주의 로맨스를 기다려왔다. (어쩌면 약간은 두려워하면서... 아니 왜? -_-;;)  헌데 유치원 시절에 몇몇 남자아이들의 이름을 대며 좋아한다고, 나중에 결혼할 거라는 결심을 토로했다가 금세 마음을 바꾼 시시한 해프닝 이후로 지금껏 6, 7년째 공주는 남자애들에게 관심이 없다. 은근히 유도심문을 해봐도 전교생 중에 썩 괜찮은 남자애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이성에 큰 관심이 없다는 뜻이겠지? 눈도 높고 어려서부터 워낙 도도한 편이라 그건 그러려니 할 수 있겠는데, 내가 보기엔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고모 특유의 콩깍지 모드임은 나도 안다) 공주를 어째서 남자애들이 그냥 두는 것인지 그건 좀 이상했다.

물론 1학년 때부터 공주에 대한 순정을 6년째 이어오고 있다는 '땅꼬마' 남자애가 하나 있다는 건 알지만(현재 이 남자애는 공주와 다른 반이다), 제 친구들이 벌써 몇 번이나 커플이 되었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별다른 연애사건이 없으니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좀 아쉽다. 하다못해 심히 연애인자가 부족한 나조차도 국민학교 다닐 때 몇번이나 스캔들이 있었는데 말이지!

그러던 차에 얼마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컵스카우트인가 뭔가에서 공주는 요번 방학동안 중국엘 다녀왔는데 그때 같이 갔던 5학년짜리 남자애가 5박6일의 여행에서 돌아온 뒤 공주에게 문자를 보냈단다. '우리 사귀자'고!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공주에게 물었더니 그냥 문자를 씹었단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느꼈나보다. ㅋ 헌데 생각할수록 그녀석이 괘씸하다. 제 아무리 연상녀 연하남 커플이 유행이라지만, 5학년 땅꼬마 주제에(공주 키가 부쩍 자라는 바람에 남자애들은 동급생들도 거의 내려다본단다) 6학년 누나를 마음에 품었으면 사귀자고 달려들기 전에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부터 해야하는 거 아닌가?!

돌이켜보니 주변인들의 요즘 연애담을 들어봐도 다 비슷하다. 가물가물 기억도 잘 나지는 않지만 과거 추억을 들춰보면 분명 누군가 먼저 좋아하는 마음을 품거나 거의 동시에 마음이 통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망설이거나 적극 응수하는 단계를 거쳐 본격적으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새는 일단 서로 '조건'과 '스펙'을 맞춰보고 '느낌'이 괜찮은 것 같으면, 혹은 별로 마음에 안들더라도 싱글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단순한 목적만으로도 '일단 사귀고 보는' 식이다. 애틋한 마음을 고백하거나 어떻게든 감정을 전하는 노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촌스러운 감정 소모를 대신하여 고가의 선물이나 커플링이 오간다. 예로부터 중매 시장에서 남녀가 조건에 맞춰 서로를 재본 다음, 세번만에 옳다구나 결혼을 결심했던 전례가 어느새 연애 분야에도 물든 모양이다.

매사에 이기심이 늘어난 요즘 사람들은 혹시라도 감정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섣불리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지는 않으면서 은근슬쩍 얍삽하게 '어장관리'만 한다는 이야기도 익히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아, 이제 나는 연애하기 정말 글렀구나, 하는 사실이다. 내가 너무 구식이라서 (물론 하도 오래 돼서 연애인자가 메말라버린 건 인정한다)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일단 사귀고 보자'는 시도 정도에는 도저히 넘어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귀자'는 말에 이미 '네가 마음에 든다. 좋아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올시다다. 오히려 그 말에는 '일단 사귀어 보긴 하겠는데 아님 말고' 하는 심보가 들어있을 뿐이다. 어린 친구들은 그 편이 더 속편하다고 말한다. 구질구질하지 않고 '쿨하게' 관계 정리가 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름지기 고백이라 함은 애틋한 감정 토로가 먼저여야 할 것 같다. 그 마음을 전하기까지 자기 감정을 곱씹고 돌이키며 망설이는 단계를 거치고 제대로 정성을 들여야 비로소 '연애'이고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5, 6학년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진짜 '연애 사건'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뭐든 어른들 따라하는 게 당연해진 요즘 사랑조차 가볍고 소모적인 유희로 변질되면 어쩌나 걱정이다. 구닥다리 고모의 마음으로는, 1학년 때부터 줄곧 우리 공주를 좋아했던 녀석이 갑자기 훌쩍 키도 자라고 멋있게 변해서 (공주 말로는 걔가 아토피가 심해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지만 ㅠ.ㅠ) 순애보를 성공시키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 같다. 그 녀석이 아니더라도, 제발이지 무작정 '사귀자'고 달려드는 놈들 대신 우리 공주에게 '난 네가 좋다'고 제대로 고백하며 접근하는 첫사랑이 다가오면 좋겠다. 고모로서 대리만족이라도 느끼게... 엇, 열세살이면 너무 빠른가? 그럼 으음, 지금 당장은 말고 몇년 있다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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