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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투덜일기 2014. 5. 6. 20:33

어김없이 올해도 아카시아 꽃이 피었다. 어제만해도 드나들며 전혀 못느꼈고, 심지어는 아까 낮에 외출할 때도 못맡았던 향기를 방금 전 음식물 쓰레기 내다놓으러 나가면서 깨달았다. 온 동네를 휘감고 있는 듯 훅 끼쳐오는 진한 향기를 아깐 왜 못 맡았을까. 5월 6일이면 예년보다 많이 빠른 건가 어쩐건가.


벚꽃을 비롯한 봄꽃은 보름이나 일찍 피었지만 그 뒤로 날씨가 하도 수상하게 오락가락, 얼마 전 비온 뒤로는 아침 저녁 다시 발시리고 춥다고 느껴졌다. 바람은 또 어찌나 불어대는지. 참담하고 암울한 세상 때문에 더 춥다고 느껴지는 건지 진짜로 기온이 많이 떨어진 건지 분간이 잘 안되고 있었는데... 


음식물 쓰레기와 아카시아꽃 향기. 새삼 참 아이러니하구나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5월은 왔고 어린이날도 지났고 석가탄신일도 지나가고 있다. 외할머니 살아계실 때면 해마다 외가쪽으로 온 가족 총출동하다시피 모였던 석가탄신일엔 어려서부터 꽤 많은 사촌들끼리, 다 자라선 어린 조카들 조르륵 앉혀놓고 찍은 사진이 많은데, 그런 사진들 속에선 대부분 반팔을 입고 있었다. 지금도 냉장고에 붙어있는 초파일 사진 속 조카들은 죄다 반팔옷이다. 올해 음력이 좀 빠른 탓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온종일 으스스 추워서 보일러를 돌렸다. 


가족모임은 어린이날인 어제 큰동생네 모여 고기 구워먹는 것으로 끝냈다. 새집으로 이사하고 열흘만엔가 현관문 열린 사이 가출해 애를 태웠던 파랑이도 어제 가보니 무사히 귀가해 있었다. 연일 비와서 벽보도 못 붙이는 상황이라 그새 안락사라도 당했으면 어쩌나 내심 쫄아가지고 차마 묻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신고하고 잘 데리고 있었단다. 엄청 다행. 오늘까지 오른쪽 어깨가 뻐근할 만큼 조카들과 배드민턴도 쳤고, 몇년째 벼르기만 했던 가족사진을 막내 카메라로 그냥 찍었다. 아버지 생전에 스튜디오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엔 첫조카밖에 없어 8명뿐이다. 막내조카 태어나고 모두 11명이 된 대가족 사진을 찍자고 찍자고 부모님이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 이상하게 못했다. 나부터 사진찍는 게 너무 싫으니 원.


엄마는 막내가 삐까번쩍한 dslr 카메라를 들기만 하면 영정사진을 찍어 내놓으라고 포즈를 취하시는데, 난 또 그게 싫어서 매번 핀잔을 주었다. 옷이 어떻네, 머리가 어떻네, 표정이 어떻네...  물론 어제도 엄만 가족사진 다 찍자마자, 영정사진 하게 독사진 한장 예쁘게 찍으라고 또 나섰다. 하이고, 이여사님 제발... 노친네의 논리는 영정사진을 찍어놓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 늬 할머니, 할아버지 봐라....그리고 한살이라도 더 젊고 예쁠 때(?) 찍어놓아야 한다나. 


그치만 여든다섯에 돌아가신 친할머니 영정을 칠순 사진(그냥 칠순기념 독사진이었을 뿐, 엄밀히 영정사진으로 찍은 건 절대 아니었다)으로 썼을 때, 모두들 15년 전의 할머니 모습을 낯설어했다. 최근 모습이 더 곱고 다정하고 예쁘다면서. 어떤 고모부는 영판 딴집 할머니 같아서 장모님 같지 않다고도 했다. 아버지 땐 너무 갑작스럽고 경황이 없어 사진 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집안 어르신들은 정년퇴직 직전의 근엄한 양복사진을 쓰라고 권했지만, 우린 일주일에 세번씩 산에 다닌 아버지의 등산복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아 근데 그렇게 수많은 등산 사진 중에 왜 쓸만한 독사진이 없는지. 드물게 있는 독사진은 다 선글라스를 끼고 계시고... 


암튼 이번 가족사진 촬영은 밥먹기 전날 내가 먼저 충동적으로 제안했다. 막연한 위기감 같은 게 작용했던 것 같다. 조카들 다 사춘기 접어들면 아예 나타나지도 않으려고 할 텐데! 녀석들 예쁜 모습으로 주르륵 옆에 앞에 앉혀놓고 찍은 사진을 갖고 싶었다. 넷 중에 둘은 벌써 나보다 키가 한참 크다. 영 보기 싫은 내 모습도 10년쯤 뒤에 보면 아 젊었구나 할텐데 뭐, 위로하면서. 제발 좀 웃어달라고 아양을 떨어대도 오랜 촬영에 떼거지로 짜증을 내며 툴툴거리던 조카들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담겼을지, 한 장이라도 제대로 건질 게 있을지 궁금하다. 있을 때 잘해줘야지,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지, 카르페 디엠, 요즘 특히 나의 모토다.  


2014년 아카시아꽃 공식 기록은 아무려나 5월 6일이라고 써두려던 게 딴소리로 흘렀다. 마음 같아선 창문 활짝 열고 아카시아 향기를 방안으로 들이고 싶은데 너무 춥다. 그래도 괜한 위기감에 창문을 여는 쪽으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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