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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수다

투덜일기 2008. 11. 27. 17:35

내가 보기에 수다스러움은 성별과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개인차일 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냥 수다스러운 이가 있고 말이 없는 이가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심하게 수다스러운 남자의 경우 그 정도와 혐오감은 그야말로 으뜸이다.
지난번 유럽영화제를 보러 코엑스에 갔을 때 지하철을 길게 타면서 꽤 심하게 지하철 멀미를 했기에 이번엔 비가 와서 길이 막히든 말든 버스를 타고 강남엘 갔었다.
확실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빗방울이 맺힌 차창을 내다보며 세상을 구경하는 재미는 마른 날과는 또 달랐다. 
문제는 소음.
갈 때는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 방송의 수다스러운 남자 디제이 때문에 괴로웠다. 이래서 젊은 사람들은 다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구나 싶었다. 다음엔 나도 휴대폰 이어폰을 챙겨갖고 다니다가 몇곡 안되긴 하지만 저장된 음악을 들으리라 마음 먹었다. 그래도 라디오 소음은 익숙해지고 나니 배경음처럼 뇌리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돌아올 때 옆에 앉았던 남자의 수다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목소리와 발음은 목청 높여 설교하시는 목사님(죄송하지만 침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목사님들의 낭낭한 설교톤은 정말이지 싫다!)의 번드르르한 어투를 따라한 듯하여, 혹시 전도사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차림새나 들고 있는 가방도, 무슨 무슨 집사님이 찾아와 무슨무슨 일을 상의했으며, 성도회 6지구에서 하는 일이 잘 안되서 온종일 여기저기 전화하느라 괴로웠다는 내용도 나의 짐작을 뒷받침해주었다.
처음엔 도대체 그렇게 길고 긴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 들려주는 휴대폰 통화의 대상이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10분쯤 지나자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지나고 있는 정류장과 동네 이름을 추임새로 넣어가며 남자가 20분 넘게 통화를 하는 상대는 아내였다. 4시도 안 된 시간에 퇴근을 하는 남자의 진짜 직업이 무엇일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남자는 온종일 있었던 일과보고를 충실하게 마치더니 아이들은 지금 무얼 하는지 묻고는 조금 있다가 학원엘 가는 듯한 아이에게 간식으로 고구마를 주면 되겠다고, 아이가 잘 먹도록 삶은 고구마를 작게 잘라 포크로 찍어먹게 하라고, 그게 싫다고 하면 사과랑 귤을 반개씩 먹이고 우유를 마시게 하면 될 거라고 친절히 설명했다. 과자부스러기는 금방 배가 꺼질 거라나. 그러고는 4시반쯤 도착할 텐데 아내의 간식으로 먹을 떡볶이를 사갈까, 빵을 사갈까, 던킨에서 도너츠를 사갈까, 연신내에서 갈아탈까, 그냥 끝까지 가서 좀 걸을까, 오늘 저녁엔 무얼 먹게 해줄 건지 끊임없이 묻고 아내의 대답을 들었다.

강남역에서 내가 버스를 탔을 때부터 이미 연결되어 있던 남자의 통화가 그 낭낭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30분 가까이 이어지자 나는 머릿속으로 하필 그 남자 옆에 앉은 나의 선택을 저주하며, 남자의 휴대폰을 확 낚아채 비오는 창밖으로 내던지는 상상을 했다. "닥쳐! 시끄럽단 말이야!"라고 외치면서...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승객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결국 남자는 30분을 넘겨 버스가 종로에 접어든 후에야 전화를 끊었고, 거의 멀미에 가까운 소음공해를 피해 대각선 앞자리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부들부들 남자에 대한 혐오감에 떨던 나도 다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창밖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남자는 아내에게 둘도없이 자상하고 사려깊고 애정 넘치는 남편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 남자는 그저 버스안에서 예의없게 목청 높여 휴대폰 통화를 하는 무뢰한일 뿐이며
사소한 일도 홀로 결정하지 못하는 쪼잔하고 소심한 의지박약의 혐오남이었다.
그렇게 사사건건 간섭하고 지시하고 의논하고 질문하는 남자라면 난 단 하루도 못 살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오래 홀로 지내면서도 외로움이란 걸 모르는 것이겠거니 하면서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말로든 글로든 이렇게 수다스러울지언정 주책없이 뻔뻔하고 수다스러운 남자는 정말 질색이라고!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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