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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쇄

투덜일기 2013. 9. 12. 16:55

포쇄 (曝曬): 젖거나 축축한 것을 바람에 쐬고 볕에 바램.   [출처: 국립국어원]

 

아열대성 기후로 바뀐 한반도에서 이제 제습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생활가전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난 외면했다. 좁아터진 집에 무슨 제습기까지! 가끔 트는 에어컨 제습기능과 물먹는 하마 몇통이면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을 웬 호들갑. 재작년과 작년 옷장에 보관한 옷들에 죄다 허연 곰팡이가 피어 세탁비를 수십만원도 더 날렸다며 냉큼 제습기를 장만한 지인들은 옷장문 활짝 열어놓고 제습기를 가동시킨 뒤 외출했다 들어오면 온통 보송보송한 집안 느낌을(그러나 그 후끈한 온도는 어쩌고!) 모를 거라며 제습기 예찬론을 펼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태 난 옷장에 곰팡이 핀 적 없거든!

 

그 장담이 무색하게도 조금 전 옷장에서 오래된 가죽옷을 꺼내본 나는 질겁을 했다. 진짜 곰팡이가 피었잖아! 작년보다 올해가 더 습했다는 증거다. 물먹는 하마는 똑같이 물높이 봐가며 제때 갈아주었는데... ㅠ.ㅠ 다행히도 본격적으로 곰팡이가 핀 건 십수년된 그 가죽재킷뿐이고 그 앞뒤에 있던 옷 두개만 덩달아 곰팡이의 피해를 보았다. 하나는 오리털 파카, 하나는 가을 재킷. 오리털 파카는 원래도 물세탁 가능이니 물걸레로 대충 닦아 세탁기로 직행. 재킷은 세탁소로 보내야하나 좀 고민하다 귀찮아서 울샴푸에 주물러 빨았다. 옷에 배 오는 드라이클리닝 기름냄새를 싫어하기도 하고, 그거 하나 들고 세탁소 가긴 더 싫고, 보나마나 곰팡이 잘 안지워진다고 먼저 연막부터 칠 게 뻔한 말많은 세탁소 아저씨를 상대하기도 싫었다. (옷장에서 곰팡이 피어 세탁비는 세탁비대로 날리고 결국 옷 여러벌 버려야 했다는 얘기도 익히 들은 바 있음) 재킷 차려입을 일도 별로 없으니 아마 올 가을에도 안입고 넘어갈 확률이 높은 옷이므로 망가져도 그만이다 싶다.

 

뜻밖의 푸닥거리를 한판 해치우고나서 문득 떠오른 것이 저 '포쇄'라는 낱말. 주로 팔만대장경이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거창한 서적 유물에만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려운 한자라서 그렇지 용례를 보니 곡식도 포쇄를 하고 의복도 포쇄를 한단다. 그러니까 내가 소홀했던 건 바로 옷가지의 포쇄. 옛날엔 요즘처럼 볕좋은 가을에 집집마다 빨랫줄을 매고는 옷이며 이불 호청을 빨아 널고 두툼한 솜이불도 햇볕에 소독했는데 요샌 그런 모습을 좀체 볼 수가 없다. 그냥 대충 덮고 깔고 살다 껍데기만 벗겨 빨거나 통째로 세탁소에 맡겨 드라이클리닝를 하기 때문일까? 아파트 베란다에 가끔 이불 널어놓은 집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고, 장마철에도 한여름에도 가끔은 군불을 때 구들장의 습기를 말려줘야 한다고 들었지만 진짜로 올해는 여름 내 단 한번도 난방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방바닥이 뜨거운 체온에 더워지면 얼른 시원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버텨야했거늘 어떻게 보일러를 돌릴 생각을 했겠나. 그러다 어젯밤에 처음으로 발 시려움을 느끼고 난방으로 스위치를 돌리고보니 따뜻하고 보송보송해지는 방바닥 느낌이 놀랍도록 상쾌했다. 진짜 가을이구나 싶었달까. 안타깝게도 어제 내린 비와 오늘밤에 예고된 비 때문에 날씨가 눅눅하고 습기도 많아 제대로 포쇄하긴 글른 날이지만, 오늘밤엔 옷장까지 다 열어놓고 보일러를 좀 돌려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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