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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투덜일기 2008. 8. 30. 00:25
가끔 욱신욱신 쑤시고 미열 때문에 후끈후끈 덥고 종일 죽으로 연명한 터라 기운도 없어
누워서 까무룩 잠들었다가 TV 리모컨 갖고 씨름하다가 또 방바닥에서 뒹굴거리다가 그게 너무 지겨워져
컴퓨터 앞에 앉아도 블로그질은 참겠는데 일은 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핑계쟁이 게으름뱅이에게 어울리지 않게 부지런히 포스팅이나 해야지.

어제 오후 오른쪽 아래의 사랑니를 뽑고 나서 치과에서 들은 주의사항은 이랬다.
거즈를 2시간 반 동안 물고 있을 것, 그동안 말을 하지 말 것. (울 엄만 2시간만 있으면 빼도  된다면서 그 전에도 자꾸 말을 시켰다. ㅠ.ㅠ 그런데 다른 지인은 4시간 동안 거즈 물고 있으랬단다.)
다음날 아침까지 피가 멈추지 않으면 다시 치과로 올 것. (다행히 아침엔 피가 멎었다)
저녁과 다음날 아침은 가볍게 죽으로  떼울 것. 뜨겁지 않게 식혀서. (식은 죽 먹기도 그리 쉽진 않더라)
처방해 준 약 이틀치는 최소한 4봉까진 거르지 말고 먹을 것. (진통제는 역시 꼬박꼬박 잘 챙겨먹게 된다)
힘든 일은 하지 말고 집에가서 쉴 것. (아마도 내일까지는 '힘든' 번역작업에 손도 안 댈 것 같다 ㅋㅋ)
칫솔질 하지 말고 다음날까지는 가글로만 양치할 것. (그런데 오늘 저녁엔 답답해서 왼쪽만 양치질했다)

머리 나쁜 내가 저거 다 외느라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원...
암튼 어젠 마취가 안 풀려서 감각 없는 입술과 혀 때문에 물을 마시려고 컵을 입에 대면 넘어가는 물보다 질질 새는 물이 많아서 낄낄 웃고는 왼쪽 입술 끝에 빨대를 꽂아 물을 마셔야 했으며
어눌한 발음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남의 살 같았던 아랫입술이 내 살처럼 느껴진 건 저녁 9시가 넘어서였다.
 
잠자기 전 새끼손가락 마디보다 큼지막한 알약이 세개나 들어 있는 약 한봉지를 먹고나선 참 수월하게 사랑니를 뽑았구나 생각했었는데 그건 완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밤이 깊은데도 후끈후끈 덥고 잠도 안오고, 뭔가 뇌의 안쪽에서 턱부분을 작은 절구공이로 통통 건드리는 듯한... 아니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내 몰골을 본 엄마는, "아니 무슨 애가 사랑니 하나 빼고 얼굴이 반쪽이 됐느냐?"고 하셨는데
웃기는 건 어제 저녁에 죽을 조금 먹기는 했지만 만 하루만에 놀랍게도 체중이 2kg이나 줄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식탐녀의 왕성한 소화장기는 맹렬하게 배고픔을 호소했지만, 성한 한쪽 이로도 우적우적 뭔가를 씹어먹을 만한 의욕이 일지 않아 맛도 없는 인스턴트 죽(아픈데 내가 사다 끓여먹으니 어찌나 서글픈지!)을 꾸역꾸역 먹었다. 그것도 순전히 약 먹으려고.

아무려나 잔뜩 겁을 먹었던 충치 치료는 그렇게 전격적으로 죄다 바꿀 상황은 아니란다.
그동안 시큰시큰 시린 느낌이 있던 이빨은 내가 칫솔질을 너무 과격하게 해서 마모되어 그런 것이라며
스켈링마저 안해도 될 정도란다! 앞으로 부드러운 칫솔로 좀 조심하며 닦으면 시린 이빨들은 또 때가 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성한 이빨도 죄다 치료시키는 의사들도 많다던데 일단은 바가지 쓸 염려가 없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그래도 서너개는 다시 치료를 해야한다는데 내가 하도 겁을 먹으니깐 그것도 천천히 하라며 썩은 사랑니부터 하나씩 뽑잔다.
그런데 이렇게 후유증이 커서야 어디 무서워서 또 사랑니를 뽑을 엄두를 내겠나.
일단은 후벼 파진 잇몸 갈아앉히고 마의 추석 행사 지내고 찬바람 나면 또 치과엘 가든지 할 생각.

치과는 빨리가면 갈수록 비용이 덜 든다는 잔소리를 누누이 듣는데도 참 실천은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치과는 무섭고 싫은 곳.
마취주사 맞을 때도 뜨끔했지만, 감각은 없는데 턱 자체가 뽑혀나갈 것 같은 막강한 힘이 느껴지는 의사의 손길을 겪고 보니 과연 내가 다시 제발로 치과를 찾을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네안데르탈인 이후 하악이 발달되지 않은 인류에게 사랑니는 필요없는 것이라 점점 퇴화중이기 때문에 아예 안나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왜 나는 3개나 나가지고 이 고생이람.
나려면 확확 일찍이나 자라든지 마흔 넘어 아직도 썩어가며 기어나오는 이빨 따위 정말 싫단 말이다!
사랑니든 지혜의 이빨(wisdom tooth)이든 제 아무리 근사한 이름을 붙여 이쁜척 해도 결국엔 퇴출대상이니
사랑니 없는 사람들과 튼튼한 이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흠.. 내일은 식탐녀의 본능을 총동원해서 아무거나 잘 먹을 수 있으려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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