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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버릇

책보따리 2011. 7. 19. 01:54

우리나라에서 싯누렇거나 거무스름한 싸구려 재생지로 만든 보급판 책이 널리 사랑받지 못하는 건 워낙 책을 숭상하는 전통 때문이라고 한다. 페이퍼백이 지천인 외국과 달리 제 아무리 시답잖은 내용이라도 책은 마트 선반에서 대충 골라 한번 읽고 내다버리는 용도가 아니라고들 믿는다는 얘기다. 그렇게 책을 신성시 하기 때문에 오히려 독서인구가 적다는 아이러니도 존재하지만, 어쨌거나 책은 독서 여부와 상관 없이 사서 책꽂이에 '진열'하는 용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내가 책을 살때 장정과 표지, 제목을 꽤 중시하고, 독서하는 동안과 이후에 띠지를 고스란히 간직했다가 다시 새책처럼 둘러 책장에 꽂아두는 버릇도 아마 그러한 전시행정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책을 훼손하는 짓 역시 당연히 금물이라 여겨 옛날부터 책장을 함부로 접거나 줄을 긋지 않았다. 가끔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다가 책장에 한방울 흘리기라도 하면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혀 호들갑을 떨었다. 얼른 닦아내어 흔적을 없애보겠다고 말이다. 예외가 있다면 교과서, 교재, 참고서적 정도. 하기야 그런 책은 독서를 하는 게 아니라 책장과 씨름을 하는 거니까 형광펜과 색깔 볼펜으로 죽죽 줄을 긋고 메모를 해두어도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뿌듯했던 것 같다. 나중에 학자가 되고 나면 그런 책들이 부끄러워 새로 다 책을 장만해 꽂아둔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나는 학자가 될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다. 내가 보기엔 옛날 교재를 다시 들춰볼 일도 거의 없을 것 같고.

암튼 그런데 최근 책 훼손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려고 노력중이다. 일부러 막 더럽게 읽거나 줄을 마구 긋는 건 아니지만 인상깊은 구절을 발견하면 일단 책장을 접어둔다. 독서노트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책을 읽으며 옆에 공책을 끼고 있다가 인상적인 구절이 나타나면 틈틈이 적어두곤 했는데 그게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다. 게다가 독서의 흐름도 확 끊기고! 뿐만 아니라 읽을 땐 괜찮은 것 같아 적어뒀는데 나중에 보면 대체 왜 적었나 싶은 문장들도 꽤 많다. 언제나 감상의 과잉에 허덕인다는 증거다. -_-; 그렇다고 또 내가 막 모든 책을 두번씩 탐독하며 내용을 정리하는 위인도 아닌지라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실은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꼼짝도 하기 귀찮은 마음이 더 컸다;)하다 그냥 책장을 확 접어 표시해두기로 한 거다. 

포스트잇을 붙여두는 방법도 있겠지만 내게 포스트잇은 통째로 수집 및 관상용 아니면 '일'과 직결된 거라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해서 처음엔 빳빳한 아트지 책장을 접는 손끝이 바르르 떨릴(과장 포함;;) 정도로 좀 찔렸으나, 그 또한 거듭되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어차피 누굴 빌려줄 책도 아니고 나 혼자만 볼 건데 뭐! 원래도 읽던 부분 표시는 온갖 종류의 책갈피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헷갈릴 필요는 없고, 책모서리가 많이 접힌 책일수록 인상깊은 구절이 많은 책임이 한눈에 척 들어오니 다 읽고 나선 꽤 뿌듯하기도 하다. 물론 접어놓은 부분은 며칠 내로 독서노트에 옮겨놓고 다시 잘 펴놓는다. 그 과정에서 역시나 왜 접어놨나, 다시 읽으니 별로다 싶은 부분도 있고, 새삼 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 일석이조다. 한번 접힌 자국은 영영 지워지지 않겠지만, 의미없는 훼손은 아니며 새로운 책버릇일 뿐이라고 세뇌 중이다. 다 읽고나서도 새것처럼 깨끗한 책이 좋기는 하지만, 안 읽어서 새것인 책(아직도 너무 많다;;)은 자랑이 아니라고.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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