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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

투덜일기 2017. 10. 26. 04:02

엄마네 집 아래층 101호 아저씨가 우리한텐 동의도 구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뒷마당에 시커먼 래브라도리트리버를 기른지 1년이 넘었다. 이사 오던날 '맹인 안내견'이라고 울 엄마한테 이야기했다는데, 알고보니 그건 진짜로 그 개가 맹인안내견 역할을 한다는 게 아니고, '맹인 안내견으로 쓰이는 품종'이라는 말이었던 듯, 그 개는 늘 뒷마당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처음 적응기에 동네 길냥이들과 밥그릇 다툼을 하면서 밤중에 컹컹 울어댈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녀석은 조용히 있는듯 없는듯 시끄러운 소음을 내진 않았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느냐! 그건 물론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덩치로 넓지도 않은 마당 한 귀퉁이에 묶여 노상 오줌을 갈겨대니 그 악취가 ㅠ.ㅠ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바로 옆102호 세입자와 싸움이 나기도 했다. 101호 세입자가 자기네 집 앞쪽도 아니고 왜 남의 집 안방 창문 딱 열면 보이는 뒷마당에 그 큰 개를 묶어놓았느냐고, 악취 때문에 여름에 문도 못 열어놓는다고... 경찰에 신고도 하고 구청에 민원도 넣어 공무원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 딱히 무슨 제제 방법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암튼 102호 살던 세입자는 얼마 전 이사를 나갔고, 그집엔 다시 갓난아기와 반려견 한 마리를 키우는 신혼부부가 이사를 왔다. 주로 친정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아주 가끔 새벽에 응애응애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릴 뿐, 온 동네 개판 느낌의 소음으로 나를 괴롭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월요일 저녁, 왕비마마와 외출에서 돌아오는데 늘 뒷마당에서 고개만 삐죽 내밀고 오가는 우리를 쳐다보던 녀석이(이번 개는 이름도 모른다. 아래층 아저씨가 안 가르쳐줬다;;) 앞마당 계단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주차를 하는 사이 먼저 내려 계단을 오르시며, 개를 무서워하는 왕비마마는 저리가라고... 할머니는 개 싫어해! 그런 얘기를 녀석에게 중얼거렸다.

그간 우리 모녀는 아래층 101호 아저씨를 꽤나 욕했다. 아니 개를 키우려거든 맨날 운동도 시키고, 목욕도 자주 시키고 냄새나는 오줌도 잘 처리해야지 맨날 묶어만 놓고 뭐하는 짓이냐고, 개 키울 자격이 없다고... 말이다. 주인이 혹 사료 주는 걸 잊은 날인지, 한밤중에 스텐 밥그릇을 발로 차 소리를 내며 배고픔의 시위를 벌이는 적도 간혹 있었기 때문에(조카네 개 파랑이가 밥그릇과 물그릇이 비면, 발로 땅~ 차서 소리를 내는 걸 봐서 같은 행동으로 짐작했음;;), 게으른 아저씨가 밥도 잘 안챙겨준다고 우린 굳게 믿고 있었다.  

앞마당에 나와 있는 녀석을 본 순간, 어라 우리가 오해했나? 저녁마다 운동 시키는 시간인가? 아니면 대변을 보게 풀어주는 시간인가? 데리고 나가려고 일부러 풀어준 건가? 주인은 잠깐 집에 들어갔고? 뭐 이런 생각이 차례로 뇌리를 스쳤다.

실제로 맨날 깜깜하게 불이 꺼져있던 아래층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불안했다. 주인이 개를 풀어준 게 아니고, 그냥 끈이 풀려서 녀석이 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면 어쩌지? 개끈 풀렸다고 아래층 사람한테 이야기를 해줘야하나? 아니지, 괜한 오지랖이면 민망하잖아! 

시커먼 그림자 같은 녀석은 계속해서 앞마당과 화단을 킁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귀찮아. 나는 아래층 현관을 두들겨 말을 해줄까 말까 약 15초쯤 망설이다, 대인기피증이 도져 그냥 2층으로 올라와버렸다. 

맹인 안내견을 할 만큼 똘똘한 녀석이면 끈이 풀렸더라도 뭐 어딜 가진 않겠지. 가면 또 어때! 맨날 묶여서 제 자리에 똥오줌만 싸고 있느니 자유롭게 떠나서 새 주인 만나는 것도 좋을지도 몰라! 그럼 드디어 우리도 지독한 개오줌 냄새에서 해방될 거야... 금세 내 머릿속에선 이런 고약한 상상까지 펼쳐졌다.

그러고는 오늘 수요일. 외출에서 돌아오신 엄마는 검정 개가 정말로 안보인다고 개 끈 풀렸던 그날 도망간건가? 아니면 주인이 그날 어디 딴 데로 데려다준 건가... 개 끈 풀렸다고 101호에 얘기해줄 걸 그랬나... 중얼중얼했다.

으음. 아마도 이런 걸 미필적 고의에 의한... 유기? 뭐라고 불러야하지? 내가 주인도 아닌데 유기는 아닌 것 같고? 방치? 아래층 아저씨는 개가 없어진 걸 알고나 있을까, '개를 찾습니다'라고 적힌 안내문도 붙이지 않았다는데,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는 있는 건가, 진짜로 없어진 게 아니고 딴 데다 데려다준 걸지도 모르지,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 일말의 책임감과 죄책감이 든다. 유기견 보호소에 들어간 강아지는 며칠 안에 주인 못 만나면... 으으. 찜찜하다. 가뜩이나 이웃집 개에 물린 뒤 패혈증으로 숨진 사건으로 모든 반려견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 요즘, 진짜로 끈이 풀려 도망 나간 거라면 덩치도 큰 놈이 홀로 돌아니며 위협적으로 보일텐데 싶기도 하고. 아무튼 진실을 모르니 결론은 나지 않는 혼자만의 고민이다.  

그나저나 글도 잘 안올리는 블로근데 여기 조회수 왜 이러지? 티스토리에서 뭔가 야로를 부리나?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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