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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투덜일기 2013. 3. 19. 17:32

오른손바닥에 가로로 5센티미터쯤 꿰맨 흉터가 있다. 예닐곱 살 무렵 수영장에서 콜라병 들고 뛰다 엎어져 여섯 바늘을 꿰매야 했다. 어린아이라서 그랬는지, 당시 의술이 그 정도였는지 암튼 마취도 못하고 그냥 생으로 꿰매야 했기에 그 순간의 기억은 수십년이 지났어도 퍽 생생하다(아마도 나중에 무용담으로 거듭 이야기를 반복하며 장면이 각인되었을 거다). 아버지와 간호사가 내 몸과 손을 누르다시피 꽉 쥐고 있으면, 의사는 한 바늘만 꿰매면 된다고 해놓고선 또 한 바늘만 더, 한 바늘만 더... 하며 거짓말을 이어갔다. 바늘이 생살을 뚫고 쑥 들어오는 느낌에 더 자지러지게 울었던 것 같다. 병원에 상처를 소독하러 다니면서도 나는 무서워서 한번도 손바닥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다 드디어 실밥을 풀던 날 처음으로 오른손바닥에 벌레가 꿈틀거리듯 지나간 검은 실밥과 우글쭈글 들러붙은 상처를 보고 내심 충격을 받았다. 당시로선 최선의 처치였는지 어쩐지, 어린아이의 작은 손에 난 상처라 어쩔 수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 이후 꿰맨 흉터가 당겨서 오른손은 왼손에 비해 완전히 활짝 펴지 못한다.

 

고1땐 또 오른손목 관절 부분에 근육이 뭉쳤다나 약간 응어리가 생겨 팔을 짚을 때마다 불편하고 아팠다. 엑스레이를 찍어본 대학병원 의사는 간단하게 잘라내면 된다며 그날 바로 수술을 권했다. 그 옛날엔 대학병원도 참 한가했었나보다. 얼결에 수술을 하고는 1센티미터쯤 되는 수술자리에 또 다섯 바늘을 꿰맸다. 어렸을 때 찢어진 손바닥도 그럼 수십바늘 촘촘히 꿰맸어야하는 거였나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손바닥이 아무 불편함 없이 다 펴졌으려나... 아무튼 집에 돌아와 우리 부녀는 엄마에게 된통 혼이 났다. 근육 뭉친 건 그냥 없어질 수도 있다는데 덜컥 수술이 웬말이냐고. 여자애 몸에 얼마나 더 수술자국을 남겨야 속이 시원하겠느냐고. 머쓱했지만 손바닥 흉터와 달리 손등쪽 손목에 난 작은 흉터는 계속 신경이 쓰여 다 나은 뒤에도 손목시계로 흉터부위를 꼭꼭 가리고 다녔다. 어느 시점부턴가 손목 흉터도 손바닥 흉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고, 휴대폰 때문에 시계 차는 일이 드물어지기는 했지만 그래서 지금도 어쩌다 시계를 찰땐 당연히 오른쪽이 편하다.

 

지난 설날엔 허겁지겁 산적을 다시 데우다가 손을 데었다. 부위는 왼손 엄지손가락의 아랫부분. 다른 때 같으면 얼른 화기 뺀다고 찬물에 담그고 얼음 찜질하고 그랬을 텐데, 미친듯이 아침상 보는 중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더니, 아침을 다 먹고 날 무렵엔 봉긋하게 물집이 올라왔다. 다들 물집 터지면 감염되기 쉬우니 잘 간수하라고 염려했지만, 그날 점심 먹고 나니 어느 결에 물집은 터져버렸다. 꽤 오래가겠구나 싶어 덧나면 안되니까 씻을 때도 매우 조심하고 약국에서 새로이 소독약과 항생제 성분이 든 새살 연고를 사다 발라주었다. 약사는 2주면 나을 거라고 했지만 2주를 한참 넘기고도 상처는 계속 딱지가 앉았다가 다시 진물이 났다가를 반복했다. 주변에선 흉 잡히겠다고 쯧쯧 혀를 찼다. 섬섬옥수 망가진지 오래인데 뭐 어때, 라며 대범하게 굴었지만 드디어 새살이 다 돋고 나서도 거무죽죽하게 남아 원래 색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흉터를 보며 가끔 웃음이 난다. 누가 보면 대단한 요리사라도 나셨나 할 것 같아서.

 

흉터는 본래부터 상처가 다 아물고 남은 자국이다. 어린시절 깨뜨린 무릎에도, 책장 모서리에 찍혔던 이마에도 흉터가 남아있다. 가끔은 이게 어쩌다 생긴 흉터더라,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하나같이 크고 작게 아팠던 역사와 사연이 담긴 몸의 기록 같다. 나날이 얼룩덜룩해진 양손을 보며 어쩌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심신의 상처가 아물고 남은 흉터의 총체가 곧 내 인생이겠구나 싶어진다. 흉터가 많을수록 더 튼튼해지는 게 아닐까나. 아오, 무슨 얘기 쓰려다 여기까지 흘러왔나 모르겠네. 암튼 나이들면서 점점 더 흉터에도 대범해진다는 것. 영영 낫지 않는 상처는 없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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