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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와 신문지

투덜일기 2011. 3. 21. 02:05

나이가 많아지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뜨악해 하거나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험들이 내게도 꽤 많다. 동네 시장 어귀에서 살아 있는 닭 한마리를 골라 주인이 탁 모가지를 쳐서 잡아가지고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털뽑는 기계에 넣어 닭털을 정리한 뒤 생닭을 팔거나 그 옆에 기름솥을 놓고 튀겨서도 팔던 닭집이라든지, 아궁이에서 연탄갈기, 석유곤로 따위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흔해빠진 흰색/검정색 비닐봉지 이전에 모든 시장에서 사용하던 신문지도 빠뜨릴 수 없다.

닭집 앞을 지나치는 게 너무 무섭긴 했지만 엄마 따라 시장 다니는 걸 좋아하던 나는 나중엔 엄마 대신 혼자 장보기 심부름을 다녔다. 그땐 모두들 플라스틱 장바구니나 동그란 손잡이에 실뜨개로 짠 망이 달린 장바구니를 가져갔다. 닭을 사도, 생선을 사도, 돼지고기를 사도, 하다못해 콩나물이나 풋고추를 사도 그 옛날 시장에선 다들 신문지 두어장에 내용물을 둘둘 말아 장바구니 안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시장터 가게마다 신문 전지를 4등분한 크기의 신문지를 몇뼘이나 되는 높이로 쌓아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학교에서 폐품을 걷을 때도 신문지가 제일 인기 품목이었고.

환경 문제로 비닐봉지 사용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이 요새 다시 일고는 있지만, 장바구니를 가져가더라도 마트를 가든 시장엘 가든 여전히 모든 먹거리는 기본적으로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것이 정석으로 굳어졌다. 무게를 담아 파는 채소를 살 때도 일단은 작은 비닐에 담아야 가격이 적힌 스티커가 나오는 판국이니까. 게다가 이젠 종이 신문 보기가 거의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지고 있으니, 재활용도가 높은 신문을 옛날처럼 쓰라고 해도 다량으로 구할 수가 없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몰라서 그렇지 신문지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는 포장재였던 모양이다. 주말에 이모가 다니러 오며 빨간 플라스틱 대야를 맞붙여 노끈으로 묶은 딸기를 들고 오셨다. 마트에서 파는 딸기는 대개 스티로폼이나 투명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지만, 과일 도매상에 가보면 그렇게 광주리 만한 빨간 대야에 수북하게 담아놓은 딸기를 팔기도 한다. 둘이 다 언제 다 먹나 싶게 걱정이 앞설 만큼 엄청난 딸기 대야를 여니 안엔 신문지 한장이 덮여 있었다. 아래쪽 대야 맨 안쪽에도 마찬가지로 신문지 한 장이 깔려 있었고.

그런데 싱싱해 보이는 딸기를 일부 씻어 먹으려니 희미하게 석유냄새 같은 것이 났다. 입맛이 무뎌진 왕비마마는 아무 말씀 안하셨지만 나는 이내 고민에 빠졌다. 딸기를 물에 덜 담갔다 씻었나? 혹시 보일러 난방유가 불완전 연소되는 비닐하우스에서 수확한 딸기라 기름 냄새가 밴 걸까? 과일가게 주변에서 혹시 기름사고 같은 게 있었나? 주말 내내 별별 가능성을 다 상상하며 찝찝한 마음으로 딸기를 먹던 나는 드디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범인은 바로 신문지다.

어느 신문사였던가 인체에 좋은 콩기름으로 인쇄한다는 홍보를 한참 했던 것 같은데, 다른 신문사들도 다 그렇게 휘발유 냄새가 안나는 잉크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갓 배달된 신문에서 풍기던 휘발유 냄새를 맡으면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면서 멀미 비슷한 증상이 생겼다. 그래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조간신문을 꼭 다 저녁때 본다고, 신문이 아니라 '구문'을 보는 거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 뒤적여놓아 그나마 휘발유 냄새가 희미해진 다음에야 두통 없이 신문을 볼 수 있는 걸 어쩌랴.

옛날 신문지는 워낙 오래된 것들을 폐지 도매상에서 떼어다가 썼을 테니 휘발유 냄새가 다 날아간 다음이었겠지만, 요즘처럼 종이 신문이 많지 않을 때는 아무래도 최근 신문을 활용했을 것 같다. 게다가 수익성이 날로 떨어지는 주요 신문사든, 사방에서 남발되는 무가지든 고가의 인쇄용 기름을 썼을 것 같지는 않으니, 예나 지금이나 신문지 특유의 매캐한 기름냄새는 변함없을 것이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그리고 워낙 과육이 무른 딸기에 그 미세한 휘발유 냄새가 온통 배어들었을 테고.

어쨌거나 식탐꾼답게 먹거리의 미묘한 맛에도 까탈스러운 나는 아직도 꼬박 닷새는 더 먹어야 할 만큼 많이 남은 딸기가 돌연 먹기 싫어졌다. 아무리 물에 오래 담가 놓아도 사라지지 않는 석유냄새를 나로선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다. -_-; 물론 아주 옛날 과일가게 좌판에 둥그렇고 큰 '다라이'에 담긴 딸기를 근으로 달아 팔 때도 양은인지 주석인지 알 수 없는 쇠다라이 바닥엔 딸기 물크러지지 말라고 신문지가 깔려 있었다. 그래도 딸기에서 석유냄새를 맡은 적은 없었는데 우째 이런 일이. 짐작컨대 이모는 아마도 과일가게를 오래 하고 있는 어느 주인에게서 딸기를 사왔을 것 같다. 신문지로 딸기를 포장해도 불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때부터 과일가게를 해온 주인장으로부터. 그렇지 않았다면 신문지 대신 과일상자 위에 흔히 덮여 있는 얇은 스티로폼이나 투명 비닐을 대신 덮지 않았을까나.

건강에 해로울지 아닐지도 모르겠고, 내 추측이 맞는지 틀리는지 자신도 없지만 암튼 방금 결심했다. 남은 딸기는 생으로 먹지 말고 쨈을 만들기로. 내 아무리 딸기를 좋아하기로서니 석유냄새 나는 딸기는 못먹겠다. 현재로선 팍팍 끓이면 휘발성인 냄새가 다 사라질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쨈으로 만들어도 그 냄새가 안 가시면 어쩌나? 작년엔가 귤쨈을 만들어본 경험에 따르면 한시간 가까이 서서 계속 저어줘야 하던데 으으윽. 괜히 시간낭비하며 일감만 만드는 거 아닌가 걱정도 앞서지만 하는 수 없다. 암튼 과일가게 주인 여러분, 딸기는 웬만하면 최근 신문지로 덮지 말아주세요. 네?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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