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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 뭔지

투덜일기 2014. 7. 15. 15:44

어차피 내려올 산을 헥헥거리며 올라가는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산이 좋으면 밑에서 올려다 봐도 되잖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려서 억지로 산엘 쫓아다녀서였을까? 북한산과 멀지 않은 동네에 오래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암튼 아버지는 꽤 젊어서부터 종종 등산을 다녔고 40대땐 부부가 아예 이런저런 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억지로 우리 삼남매를 등산에 끌고 갔다. 봄엔 진달래 능선에 핀 예쁜 꽃을 봐야한다면서, 가을엔 눈부신 단풍구경을 하자면서, 겨울엔 나무에 얼어붙은 눈꽃이 얼마나 예쁜지 아느냐면서... 

등산화 없다는 핑계를 대면 새로 아이젠까지 다 사주면서까지 어떻게든 꼬드겨 애들을 산엘 데려간 걸 보면 그 정성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따라나선 우리들이 착하다고 해야할지. 그 옛날엔 모든 산에서 취사가 가능할 때였으니, 코펠에 버너에 쌀과 반찬에 짐을 한보따리 홀로 짊어지고 밥짓는 노동까지 다 도맡아하면서도 아버진 뭐가 그렇게 좋으셨는지 지금도 좀 의아하다. 산에서 먹던 코펠밥과 삼겹살과 김치찌개가 엄청 맛있긴 했지만, 그 맛에 또 따라나서겠다고 할 만큼 대단하진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의 '등산 차출'에 동원되었던 건 아마 나 대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던 듯. 막내나 큰 동생은 나보다 몇 번 더 끌려(?) 갔을지도 모르겠다. 

등산이라면 절레절레 인상부터 쓰던 내가 수학여행 때 한라산엘 올라갔던 건 순전히 지도교수로 따라간 할머니 교수님 덕분이었다. 요즘이야 뒷동산엘 가도 등산화에 아웃도어에 배낭에 히말라야 등반도 불사할 차림으로 나서는 게 유행이지만, 그때 우린 대체로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고 (심지어 정장바지에 구두를 신은 우리과의 퀸카 '패셔니스타'도 있었다!) 배낭은커녕 여관에서 아침에 싸준 은박 도시락과 물 한병을 각자 비닐봉지에 덜렁덜렁 들고 나선 터였다. 정상까지 가겠다는 생각도 당연히 없었고, 대충 올라가다가 점심 도시락 까먹고 내려와야지 싶었다. 그런데 정년퇴임을 앞둔 할머니 교수가 어찌나 깐족거리시는지... 늙은 나도 올라가는데 젊은 니들이 뭐가 힘드니, 여기까지 왔는데 백록담은 보고 가야지...

결국 얼떨결에 나까지도 한라산 정상을 올랐고, 지금까지도 그 사건은 불가사의한 추억담이다. 스물한살의 팔팔한 패기 와 오기 탓이었겠지만, 나이키 운동화에 무겁고 꽉 끼는 청바지까지 입고 대체 어떻게 한라산을?! +_+ 하여간 내 인생의 등산은 그날 한라산 해발 1950미터를 정점으로 영원히 끝이라라고 생각했다. 설악산은 흔들바위 이상 올라가본 적이 없고(케이블카 타고 권금성엔 올라갔다 ㅋ) 각종 단풍놀이로 간 내장산, 속리산, 주왕산 등등도 중턱이나 가봤을까. 직장인 시절 야유회를 산으로 가면 중간에 도망쳐 집으로 가거나 산 아래 막거리집에서 기다리는 쪽이었다. 

근데 그러던 내가 변덕도 유분수지, 최근 등산을 몇번 따라갔다.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낭떠러지가 무서워서 눈앞이 노래지는 순간을 겪으며 내 미쳤지! 다시는 안 따라올란다! 결심해놓고는 다음번에 또 따라가기를 벌써 서너번 했나? ㅋㅋ  운동삼아 동네 앞산 뒷산을 오르겠다고 장담할 때부터 스스로 좀 이상하긴 했는데 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뭔가에 홀린 듯 등산화, 등산바지에 이어 스틱까지 장만하고는 요즘 계속 등산용품을 기웃거리고 있다. 어쩌면 마라톤화, 인라인스케이트, 자전거, 요가에 이어 또 그냥 흐지부지 운동타령 푸닥거리로 반짝하다 말 짓일 수도 있겠다. 스스로도 못 미더워서 아직 배낭도 손바닥만한 엄마 걸 빌려갖고 다니고는 있는데 과연... 이건 그냥 물욕, 쇼핑욕일까 아니면 새로운 취미에 대한 초보스러운 열망일까. ㅎㅎㅎ

알록달록 색깔과 봉제선이 요란한 아웃도어는 또 내가 무진장 싫어하는 패션이어서 다행히 기능성 등산복엔 별로 눈길이 안가는데 배낭은 아무래도 꼭 하나 장만해야할 것 같고 ㅋㅋ 등산화도 아무케나 제일 가벼운 걸로 광고모델 봐서 덜컥 산 거 말고 좀 안미끄러운 놈으로 제대로 하나 또 사야하지 않겠나 싶어서 계속 등산용품 사이트를 들락날락... 아무래도 등산화와 배낭은 고가품이라 확 저지르기 전에 몇달째 망설이고만 있는 우유부단함이 이번엔 나름 미덕이다. 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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