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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9 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 9

안 쓰던 북리뷰는 계속 안 쓰는 게 좋겠고 특히 따끈한 신간 후기는 검색망에 걸려들기 쉬워 괜히 난감(?)할 수도 있으니 안하겠다고 선언한지 얼마나 됐다고, 손바닥 뒤집듯 또 독후감을 쓴다. 의지력 박약 및 우유부단, 내가 그렇지 뭐.

폴 콜린스 지음/홍한별 옮김/양철북

일단 옮긴이의 블로그에서 이 표지와 제목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낚인 게 틀림없다. 전작 <밴버드의 어리석음>을 읽고나서 폴 콜린스라는 사람 참 대단하고 신기한 사람이구나, 역자가 소신껏 밀어줄만한 작가로구나 생각은 했지만, 토머스 페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대번에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으니 제목 한번 잘 지었다 싶다. 거기다 상식의 탄생과 수난사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끌기 충분하다. (다 읽고 보니 중의적이다. 그 옛날 18세기에 이미 토머스 페인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이 지극히 '상식'이라고 주장했고, <상식>이라는 책도 펴냈다) 역사가 외면하고 잊어버린 기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두는 폴 콜린스의 취향은 이번 책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지는데, 전작 <밴버드의 어리석음>보다 대중적이고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 읽는 재미도 훨 낫다. 

토머스 페인. 미국 건국의 아버지란다. 심지어 미합중국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냈으며, 자기 주머니 돈을 털어 미국 연방준비은행(뉴스에서 자꾸 '연준'이라고 해서 내가 못 알아먹었던 그곳의 역사가 이리도 오래됐구나!) 종잣돈을 마련했고, 미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한 책 <상식>을 써서 '독립선언문'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영국에서 군주제 폐지를 부르짖다 반역자로 조국에서 쫒겨나 프랑스에서 혁명운동을 하다 투옥됐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끊임없이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던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비난하는 <이성의 시대>라는 책 하나 때문에 독립영웅 대신 혐오스런 무신론자로 배척 당하다 끝내 가난과 고독에 허덕이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어쩜.. 이름도 하필 Pain, '고통'이람. 나중엔 끝에 e를 넣었다지만 영어로는 고통, 한국말로는 '폐인'의 어감이 난다. 혹시 그의 수난은 작명탓이 아닐까 잠시 딴 생각이 들었다만, 뭐 그의 일족이 죄다 그런 일생을 살았을 리는 없겠지.)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면 벤저민 프랭클린 아닌가?(그러니까 무려 100달러짜리 지폐에 얼굴이 새겨진 게 아니었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면 나도 한번쯤 들어봤을 텐데(물론 내가 상식이 풍부하거나 세계사를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금시초문인 걸 보면 뭔가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책은 토머스 페인의 '전기'가 아니다. 토머스 페인이라는 인물은 그저 대 전제로 존재할 뿐 이야기의 골자는 어디까지나 그의 '사라진 유골'이다. 프랭클린의 장례식에는 2만명의 조문객이 참석했다는데, 페인이 매장될 때 참석한 인원은 달랑 6명이었다. 퀘이커 교도였던 그는 교회 묘지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그 어디서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 결국 그의 시신은 살던 오두막 근방의 마당 한구석에 묻혔다. 

10년 뒤, 한밤중에 누군가 그의 유골을 파내 영국으로 가져간다. 살아생전 토머스 페인을 사사건건 트집잡고 비난하고 논쟁을 벌이고 조롱했던 골수보수주의자 윌리엄 코빗의 소행이다. 페인이 죽은 뒤 개처럼 버려져 묻혀야 한다고 독설을 퍼붓던 코빗은 뜬금없이 페인의 기념비를 제대로 세워줄 목적으로 그의 유골을 파내 대서양을 건너왔다. 긴 세월을 거친 뒤에야 페인이 주장하던 진보적인 진리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허나 영국에서 그런 일을 호락호락 허가할 리는 없다. 통관부터 문제가 되었던 페인의 유골은 기금 마련에도 어려움이 생기면서 계속 방치되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떠돈다. 금서였던 그의 책은 다시 용기 있는 젊은이와 서적상 덕분에 암암리에 유통되고, 페인의 생애도 재조명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시각은 부정적이므로 페인의 유골은 계속해서 '뜻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별로 힘은 없는 이상주의자, 진보주의자들에게나 관심의 대상이다. 

이 책은 그렇게 추종자들의 관심망에 따라 페인의 유골이 정처없이 떠돈 흔적을 뒤쫓아가며,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리도 페인의 유골에 관심이 많았는지 결국 페인의 유골은 어디에서 안식을 취했는지(또는 영영 떠돌고 마는 것인지) 독자의 궁금증을 잔뜩 부추기며 대서양을 오간다. 급기야 두개골 따로, 뇌 따로, 왼손과 일부 유골 따로, 몸 따로 흩어진 페인의 자취를 좇는 과거(페인의 유골을 손에 넣었거나 유통한 사람들의 역사)와 현재(옛날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지은이의 행적)의 시선이 공존한다.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나 싶으면 유골은 또 파산이나 몰락의 이유로 또 다시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간 뒤인데,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아낀다. 설마 찾겠지, 어디든 페인의 유골이 방황을 멈춘 곳이야 있겠지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책의 후반부다. 그래서 폴 콜린스가 분실된 페인의 유골을 결국 추적하는데 성공했느냐고? 물론 그건 나도 알려줄 수 없다. ^^;;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시기를! 지금 생각하면 엽기적으로 생각되는 19세기 영국인들의 각별한 유골 사랑(아 글쎄, 밀턴의 유골도 일부 도난당했다네!)과 기이한 수집벽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덤이다.  

토머스 페인도 낯선 마당에 그를 추종한 영미권의 수많은 사람들 이름은 책장을 덮고 나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가운데 남부출신의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였다가 사상이 완전히 바뀌어 페인의 추종자가 된 몬큐어 콘웨이는 워낙 독보적이라 두드러진다. 골통보수라고 할 수 있는 순회목사였던 콘웨이는 에머슨 목사(우리가 아는 그 랠프 왈도 에머슨 맞다)의 글을 읽고 신학공부를 다시 하기로 결심하는데, 에머슨을 찾아가 만나면서 계속해서 소개받고 만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대단하다. 짐작하다시피 호수 근처 이웃은 소로이고, 인쇄공으로 일하는 노동자 시인을 소개받아 만나고 보니 휘트먼인 식이다. 그 뿐만 아니다. 페인의 자취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선 또 테니슨 경, 새커리, 로버트 브라우닝, 다윈과 교류한다. 마크 트웨인, 해리엇 비치 스토 부인, 찰스 디킨스까지, 전부 다 콘웨이의 '지인'들이다. 우와, 역시 유유상종이로다.

콘웨이가 그 유명한 지인들과 주고받는 대화는 거의 선문답이다. 이를테면,
"정신이 일단 어떤 상태에 다다르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열매가 맺히는 법이지."(p144)
<블랙우즈 매거진>에 실린 에머슨의 글을 읽고 콘웨이가 얼마나 감동을 받고 삶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는지 고백했을 때 에머슨이 겸손하개 해준 말이란다. 또한 에머슨은 목사의 존재 이유가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로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면서 "학교 회의에 양심적인 사람 한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하고, 지역사회 모임을 돕고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있기는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파리 한 마리가, 존재하는지 않는지 불분명한 천사보다 더 중요하네."(p145)라면서.
하버드 재학 시절, 남부 출신으로 노예문제에 이견을 갖고 있는 콘웨이가 양측의 공격을 받을 때 에머슨은 또 이렇게 충고한다.  "위대하다는 것은 (...) 오해 받는 것일세."(p154)

"약간 쌉싸래하죠. (...) 하지만 그게 경험입니다."(p156)
월든 호수를 같이 산책하며 소로가 콘웨이에게 풀잎을 씹어보라고 한 뒤 한 말이다.

워낙 유명인들과 교류한 콘웨이가 내 기억에 유독 남았을 뿐이지 페인의 유골 행방을 좇은 사람들은 대부분 흥미로운 개인사를 갖고 있다. 당시로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주장(여성에게 피임법을 알리거나,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등;;)을 펼치거나 실천하려던 그들이 토머스 페인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페인의 사상은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펄떡거린다.

"관용은 불용의 반대가 아니라, 불용을 아닌 척 위장하는 것이다. (...) 둘 다 전제주의다. 불용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관용은 양심의 자유를 허가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p198)

페인은 자기 묘비명에 단 한 구절 "<상식>의 작가"라고 새겨달라고 했단다. 46쪽에 달하는 소책자에 불과하지만 그의 사상이 축약되어 있고 책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그만큼 깊다는 의미다. 책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으로도 나 역시 페인의 팬이 될 것 같다.
"어떤 그릇된 것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오래 굳어지면 겉보기에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p35)
"우리에게는 세상을 다시 시작할 힘이 있다."(p40)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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