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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11 엄마가 달라졌어요 18

듣기 좋은 칭찬도 계속 되풀이하면 짜증나게 마련인 것을 나는 병든 엄마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만 수년째 해대는 무서운 딸이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소용없는 엄마의 망각과 무심함을 간간이 대놓고 지긋지긋해하면서. 내가 하는 잔소리는 대략 이런 거다.

매일 매일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해야 한다.
과식은 금물, 식사는 천천히, 많이 씹어야 한다.
식후 곧장 드러눕는 건 역류성식도염으로 가는 지름길.
노상 못한다 못한다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시도해봐라.
쓸모없는 인간이라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되지 않느냐. (집안일 좀 도와달라는 뜻;;)
멍하니 TV 많이 보면 바보 되니까 책 좀 읽으셔라.
제발 TV 볼륨 좀 작게 틀어라...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엄마가 내게 하는, 밤에 일하지 말고 일찍일찍 자라, 살 좀 찌게 많이 먹어라, 병원 가라, 따위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듯 엄마도 내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듣고 무시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내게 화를 내는 법은 없는데, 나는 엄마가 내 말 안듣는다고 버럭버럭 화를 내거나, 실망스러워 아예 입을 꼭 다물고 대화를 거부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엄마가 칠순을 넘긴 노인이며 각종 성인병 더하기 우울증까지 갖춘 환자이므로 내가 더 많이 이해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은 혼자 반성하는 밤에만 찾아올 뿐,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면 짜증이 치밀었다. 지쳤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딸이 책으로 밥을 빌어먹는 사람이든 아니든 울엄마는 원래부터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젊은시절엔 드문드문 아버지가 들고오는 책을 함께 읽었고, 여성중앙 같은 월간지를 정기구독하기는 했어도, 라디오와 TV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만큼 열심히 독서하는 모습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번역하는 책마다 증정본이 수북이 날아들면 자기도 읽어보겠다면서 괜히 한권씩 가져다가 화장대에 쌓아놓기는 열심히 하셨지만 읽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나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어차피 엄마가 흥미를 갖고 읽으실만 한 책도 별로 없었고. -_-;;

구구단 외기보다, 화투치기보다 독서가 치매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책읽기가 복합적인 사고와 감각 활용을 요하는 고도의 두뇌활동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신 시끄러운 우울증 환자가 가만히 집중해 책을 들여다보는 게 쉬울 리 없다. 나 또한 예민함이 극에 달하면 활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는 데, 왜 그걸 모르겠나. 그러니 더더욱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식사시간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TV와 함께 하는 엄마를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노친네들의 유일한 취미생활이 TV라지 않은가.

같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문화센터를 다니며 뭔가를 배우고, 김치를 담가 자식들에게 퍼돌리고 한다는 엄마의 동창들 얘기에 그저 부러움만 품을 뿐이었다. 물론 손자손녀 육아에 허리가 휠 지경인 엄마의 친구분들은 왕비마마처럼 손가락 까딱 안하시는 울 엄마를 일견 부러워한다고 했다. ("얘, 너는 복 많은 줄 알아!") 하기야 나로선 엄마가 한달에 한번 동창모임에 홀로 외출을 하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일년에 못 나가시는 달이 절반 가까이니 원.

그러던 엄마가 최근 좀 달라지셨다. 지난 3월에 입원했을 때만 해도 100에서 7빼는 셈을 나보다도 더 잘하더니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지면서 7빼기 셈은커녕 구구단도 엉뚱하게 대답할 정도라, 나의 애를 태운 게 불과 한달 전이다. 단축번호로 잘 걸던 휴대폰 사용도 낯설어 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일단 TV를 꺼버렸다.(엄마 스스로도 '정신통일'이 되지 않는다며 드라마 따라가기도 어려워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불경 베껴쓰기를 '숙제'로 내주었다. 가뜩이나 악필인 엄마 글씨는 도저히 알아보지 못할 수준으로 흔들렸다. 손이 아프다며 오래 쓰지도 못했다. 차선책으로 나는 다시 책을 내밀었다. 질병이든 노화든 극복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어찌보면 아주 빤한 이야기를 담은 심리실용서였다. 내가 작년부터 입이 아프게 했던 잔소리도 거의 다 그 책에서 주워들은 내용을 써먹은 거였다. 노인용으로 활자가 크게 찍힌 책도 아니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엄마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조금씩 달라졌다. @.@

백문이 불여일독!? 어려운 용어도 많고 활자도 작아서 진도는 지지부진 형편없고, 자꾸 내용을 까먹어 읽은 데 또 읽고 또 읽고 한다지만, 엄마는 자기 이야기를 쓴 것 같다며 하루에 몇 시간씩 꼬박꼬박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더니 그 내용을 급기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달력에 표기해가며 하던 화분에 물주기를 엄마가 하고 있다. (책에도 요양원 노인들에게 화분 가꾸기 책임을 맡게 하였더니 자존감과 삶에 대한 주도의식이 높아져 수명도 길어졌다는 사례가 나온다;;)
허리가 아파서 통 못하겠다던 설거지도 거의 하루에 한번은 엄마가 해주신다. (야호!)
약의 종류가 하도 복잡해서 어떻게 분류하는지 모르겠다던 아침약, 저녁약 통에 담기도 지난주부터는 엄마가 '혼자' 한다. (그간 약의 종류가 꽤 줄긴 했어도 여섯 칸으로 나뉜 플라스틱 통에 아침과 저녁 약을 종류별로 나눠 담는 건 정말 나도 귀찮은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담아놓고 먹어야 매일 약을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몇년째 세탁기 돌리는 법도 까먹어서 못하겠다고, 그러니 죽어야 한다고 울상이시더니만 한번 해보겠다고 나선 게 벌써 몇번째다. (비록 헹굼 추가 버튼은 내가 눌러야하지만 이게 어딘가!)
내가 절반도 먹기 전에 밥그릇을 비우던 엄마가 요샌 나보다 더 느리게 드시는 때가 많다. (결과적으로 체중도 꽤 줄었다!)

지금도 집안이 고요하다. 엄마가 책을 읽고 있다는 뜻이다. (고맙게도 아래층 똥개마저 오늘은 조용한 편이다) 집안의 소음 여부가 빈부의 환경 차이에도 기준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물론 부자가 아니지만, 고요함이 주는 평화에 마음이 다 푸근해져서 부자가 된 것 같다. 가장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 엄마의 변화다. 당연히 냉랭하던 모녀관계도 엄청 호전되었다. 나는 남편이 아니니까 애기처럼 기대지 말라고, 온몸으로 밀어내는 제스처를 취하던 딸이 원하는 건 결국 늙은 엄마의 엄마노릇이었던 거다. 뜻밖에 책 한권으로 촉발된 모처럼만의 변화에 고무된 나는 엄마가 흥미를 가질만한 책이 또 뭐가 있을까 벌써부터 고민중이다. 노인용으로 활자 크게 나온 책이 뭐가 있는지 서점엘 나가볼까. 못된 딸년은 기회는 이 때다 싶어 계속 엄마를 부려먹을 생각만 키우고 있다.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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