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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투덜일기 2014. 11. 4. 17:23

집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화교들이 많이 모여산다. 인천 어느 동네처럼 아예 '차이나타운'이라고 이름까지 붙은 건 아니지만 주변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이 몹시 많고, 꽤 오래된 화교 학교도 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산꼭대기 학교가 워낙 춥고 등하굣길도 험해서 드물게 교복바지를 입는 게 허락된 학교였는데 동복 교복 바지에 남색 코트를 입고 버스에 오르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종종 물었다. 너네 화교 학교 다니니? (내 기억으로도 교복바지 입는 여학생들은 서울시를 통틀어서도 그 화교 학교 아이들과 우리 학교 애들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당시 8번과 522번 버스 노선이 우리학교와 옆동네 화교학교를 모두 통과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깐 나의 모교도, 옆동네 그 화교 학교도 역사가 꽤나 길다는 의미.


몇년 전까지만 해도 오후 무렵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화교 학교 앞에서 교복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타면 사방에서 중국어가 들려 왔었다. 경복궁에서도 종종 느끼지만 중국어는 4성이 있어서 높낮이가 유별나 한꺼번에 여럿이 떠들어대면 진짜 시끄럽다. 경상도 사투리 쓰는 단체가 더 시끄러울지, 중국인 단체 관객이 더 시끄러울지 언제 한번 소음도 테스트를 해보고 싶을 정도로. ^^;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떼거지로 버스에 타면 어느 언어를 쓰든 시끄럽게 마련. 나 중고생때도 친구들이랑 버스에서 떠들다가 운전기사 아저씨나 다른 승객들한테 핀잔도 여러번 들은 것 같으니 말 다했지. (나는 나름 얌전했는데 친구들 탓이라고 극구 주장;;; ㅋㅋ)  


암튼 귀화를 했든 안했든 이 나라에 사는 어린 화교 학생들이 평소 제1언어로 중국어를 사용한다는 게 나로선 엄청 신기했었다. 중국인들이야 세계 어느나라를 가도 그건 마찬가지라지만, 외국으로 이민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이들 현지 적응하는 걸 우선시하다보니 1.5세만 되어도 우리말 다 잊어버리고 제 부모랑 소통도 잘 안된다던데! 하물며 잠깐 유학을 갔거나 해외주재원으로 나간 덕분에 어린 애들을 몇년 외국어에 노출시킨 친구들을 보면, 한국어 딸린다고 돌아와서도 아예 국제학교나 외국인학교엘 보내기도 한다. 헌데 중국인들은 어느 나라엘 가도 아이들까지 모국어를 철저하게 사용하고 있으니 그 자부심이랄지 고집이랄지 존경스러울 수밖에.


헌데 한류 덕분이었을까? 얼마전부턴 똑같이 화교 학교 정류장에서 올라탄 아이들인데 아무리 유심히 들어봐도 학생들이 그냥 다 우리말로 떠들어서 진짜 화교 학교 아이들인지 다른 학교 아이들인지 헷갈릴 정도다. 헐... 대박... 졸라... 특히 애들이 많이 쓰는 추임새며 욕까지 거침이 없다. 교복과 교표를 보면 분명 그 학교 애들 맞는데... 학교에선 분명 한국어 수업을 듣긴 해도 전과목 죄다 중국어로 수업을 할텐데 우와... 아이들이 달라진 거다. 물론 화교 부모들은 집에서 엄격히 중국어를 쓰도록 여전히 교육하고 있을 것 같지만 (나의 편견에서 비롯된 상상일까?? ㅋ) 그래서 여전히 그 아이들의 제1언어는 중국어일 확률이 높지만, 친구들끼리는 거침없이 한국어로 소통하는 그 아이들은 완벽한 이중언어사용자인듯! 


오래 전 출판사일로 대만에 출장을 갔을 때 하루 동안 현지 가이드와 상담 통역을 부탁했던 남자 하나는 한국으로 이민온 부모님과 함께 화교로 살다가 여러가지 차별적인 법규와 세금 문제 때문에 대만으로 돌아간 경우였다. 요샌 많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재한중국인들은 한국에서 재산권도 제대로 행사할 수가 없고 세금도 엄청 더 많이 내야한다고 억울함을 토로했었다. 귀화를 선택하지 않는 한은 한국에서 일자리도 잘 얻을 수가 없었다나...  부모님 운영하시던 중국집 물려받는 거 말고는 통 비전이 안 보여서 대만으로 유턴했다는 그 남자 얘기에, 따지고보면 정말 인종차별, 국적차별 심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나도 막 열 올리며 거들었던 것 같다. 그 남자 말로는, 한국에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이 특히 불친절한 이유가 뭐냐면 돈을 암만 많이 벌어도 세금으로 다 빼앗아 가기 때문이란던데 ㅎㅎ 요새도 그런가 어쩐가 되게 궁금하다. (화교도 아니면서 불친절한 한국 식당들은 그럼 이유가 뭘까나? ㅋㅋ 아 왜 얘기가 이리로 흘러갔지 -_-;;)


하여간 이 땅에 정착한 화교들의 역사가 오래 되다 보니 어쩌면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의 유럽이나 미국에 정착한 각국 이민자 2세, 3세들처럼 중국어 대신 이젠 한국어가 더 편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 혼자 하고 있었다. 설마 집에서 엄마랑 싸울 때 엄마는 중국어로 혼내고 아이는 한국말로 대들고 그러는 거 아냐? 이러면서 혼자 시나리오까지 막 쓰고 말이지.... (LA로 이민간 친구네 애들이 자랄 때 딱 그랬다. 친구는 막 한국말로 혼내고 사춘기 아들놈들은 막 영어로 소리치고... 서로 알아듣고 싸움을 이어나가는 게 나로선 신기;;) 


바로 어제 마침 또 화교 학교 아이들 하교시간에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게 됐는데 유독 예쁘고 잘생긴 남녀학생들이 우르르 버스에 오르더니 한국말로 떠들뿐만 아니라 카톡도 한글로 주고받는다는 걸 발견! 호기심에 자꾸만 눈길이 그쪽으로 돌아갔는데... 대부분의 친구들이 내리고 버스 맨 뒷좌석 내 옆에 아마도 커플인 듯한 남녀학생 둘만 남은 순간, 아 도란도란 속삭이는 둘의 대화는 다시 중국어였다! 게다가 하나도 안 시끄러운 나지막한 말투.... 맞다. 그러고 보니 중국 영화를 봐도  탕웨이, 장국영, 양조위, 주윤발이 하는 중국어 대사는 조근조근 감미롭기만 했었지....


한국에 살지만 (국적취득 여부에 따라서) 한국인은 아닐 수도 있고 모국어는 중국어지만 한국말도 그에 못지않게 잘하고 이중언어에 전혀 스트레스 안받으면서 (부디 그러기를) 다정하게 속삭일 땐 중국어를 쓰는 그 십대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괜히 마음이 뭉클했다. 추성훈과 사랑이도 떠오르고, 서경식 선생과 거창하게 디아스포라 어쩌구 하는 말도 떠오르고... 어쩌면 내가 이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에 버럭버럭 '아 진짜, 이민가야하나....'라고 수시로 중얼거리기 때문일지도. ㅜ.ㅡ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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