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06.20 엄마의 발원문 8

엄마의 발원문

투덜일기 2014. 6. 20. 16:51

며칠에 한번씩 연필 깎아대기 귀찮아서 연필 깎는 기계를 살까말까 고민하는 포스팅을 했다가, 결국 반성하고 계속 연필깎이 봉사를 보태기로 했던 엄마의 금강경 필사는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되고 있다. 매일 새벽 거의 2시간씩 꼬박 식탁에 앉아서 금강경을 베껴적으시는데, 이젠 아는 한자가 많아져 속도도 빨라졌고 목표로 했던 7권 가운데 마지막 한권만 남았다는 것 같다. (1권에 3번씩 쓸 수 있으니 총 21번을 쓰는 셈)

 

노친네가 1월에 빙판길에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초반부엔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1달에 한권씩 써서 백중(8월 10일이다) 전에 다 끝내겠다던 대장정이 순조롭게 결실을 앞두고 있다. 6개월이 지나는 동안 너무 짧아진 연필 몇 개는 버리고 새 연필을 서너 자루 더 깎아드린 것 같다. 지켜보는 사람으로선 참 대단한 끈기이고 정성이다 싶어서 존경스럽다가도, 간혹 잠도 안자고 새벽 3시에 막 필사하겠다고 나서면 억지로 다시 방으로 쫓아보내 더 주무시라고 하면서 버럭 화가 난다. 뭐든 스트레스가 되면 안되는 거라구욧!

 

엄마 본인의 말로는 학창시절 공부를 못했단다. (딸에게 이런 고백을 스스럼없이 하는 엄마라니.. 참 나.) 하여간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많이 졸다가 쉬는 시간에만 재잘재잘 살아났고(요즘도 한달에 한번 만나는 엄마의 고교동창들이 그런단다. 얘, 너 학교 다닐 때도 엄청 수다스러웠어!), 집에서도 공부 좀 할라고 그러면 어찌나 졸린지, 시험 앞두고서도 할머니한테 새벽에 깨워달라고 하고는 내쳐잔 뒤 다음날 안 깨웠다 신경질만 부렸단다. 할머니가 왜 안깨웠겠나, 깨워도 그냥 잤겠지. ㅋㅋ 게다가 워낙 악필이라 수업시간에 적어온 필기 내용을 (아마 졸면서 적어서 더 그랬을듯;;) 본인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는 게 함정. 그뿐인가. 무려 고2때부터 이후 8년간이나 이어지는 연애질을 시작해 종종 학교 수업 빼먹고 명동으로 영화구경도 다녔다니, 공부를 대체 언제 했겠나! (가끔 울 아빠가 읽어보라고 건네주는 책--주로 고전--읽기에도 바빴다고;;)

 

하여간 공부를 잘 해보고 싶어도 잘 안됐던 그 시절의 로망을 요즘에 투사하는 건지, 엄마는 뭐든 금강경 필사만큼이나 열심이다. 실버 아카데미 다닐 때는 무결석은 물론이고 숙제도 그날 오자마자 상 펴고 앉아 몇시간씩 낑낑대며 다 해치웠고, 요즘도 활동중인 실버 합창단은 열혈 선생이 구워준 CD를 집에서 연거푸 들으며 악보 챙겨와 따로 예습복습까지 해갈 정도다. 자고로 선생이 예습복습 해오란다고 정말로 해가는 아이들이 반에서 1퍼센트는 될까? -_-;; 암튼 그래서 엄마는 합창단 지휘자 선생도 인정하는 모범생이다. 

 

예전에 엄마가 서예 배우러 다닐 때도 신기하게 느꼈던 건데, 한글 글씨체는 진짜 악필인데 한문 글씨체는 잘 쓰는 편이라는 것! 나는 한글도 엉망이지만 한문 적어놓으면 그야말로 어린애가 그려놓은 듯 우스꽝스러운데, 금강경 필사야 밑에 흐린 점선으로 적혀 있는 대로 베껴적어서 그렇다치고 일반 공책에 한자성어 적어놓은 것도 한글은 지렁이 기어가듯 보이는 반면 한문 획은 반듯하다. 나로선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그래도 몇달째 필사를 하면서 손아귀에도 힘이 생겨 악필도 많이 나아진 것 같다.  금연하라고 하사금까지 내렸는데 아직도 몰래몰래 담배를 피워 노친네 애를 태우는 동생놈들 양심 찔리라고 엄마의 발원문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노친네가 쌓고 있는 정성의 힘이 어떤 절대자의 마음을 움직인다거나 해서 소원이 덜컥 다 이뤄진다고 믿진 않지만(신은 없다니깐!) 이런 과정을 실천하고 지켜보는 인간들이 슬그머니 변모하려는 노력은 낳게 되지 않을까. (마지막 두 줄은 나와 괜히 티격태격한 날 덧붙인 모양이라 나도 찔린다. 버럭버럭 마감 스트레스 괜히 엉뚱한데 풀지 말고 나도 뾰족한 말 좀 덜 하기를 바라는 차원의 포스팅...)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