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

여행담 2012. 11. 16. 15:01

겉은 고택이되 안은 새로이 단장한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곤하게 자고 일어난 아침,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침을 뭐라도 먹고 움직여야 하나, 일단 나가서 움직이며 배를 채워야 하나... 하룻밤 잠만 자고 나가기엔 너무 아깝다. ㅠ.ㅠ 갖고 있는 먹거리라곤 귤 몇 알과 티백 커피, 차뿐임을 잘 알기에, 우유부단하게 고민만 하고 있는 내게 친구가 일단 나가보자고 말했다.

 

꾸물럭꾸물럭 짐을 싸 아쉬운 마음으로 치암고택을 나서며 전날밤 깜깜해서 제대로 보지 못한 집주변을 먼저 감상했다. 이 또한 참 잘생긴 한옥일세.  

 

왼쪽으로 살짝 낮고 검게 보이는 것이 주인의 살림공간인 듯한 안채. 사랑채에도 객실이 두 개 있는 듯하던데 6명까지 묵을 수 있는 큰 방에 고가라 예약할 때 아예 염두에 두질 않았으나 실물로 보니 탐이 났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여럿이서 사랑채에 묵어보리라! 

 

오른쪽 방문 열린 곳이 바로 우리가 묵었던 별채 계명재. 안채, 사랑채와 동떨어져 있어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고 독립적인 느낌은 좋았으나, 방문 밖이 바로 주차장이고 엄밀히 말해 대문 '밖'이라 별로 튼튼해 보이지 않는 문고리를 보며 약간 걱정스럽기는 했다. 

 

별당아씨 놀이를 기대했던 친구는 섬돌 바로 코앞까지 대놓은 자동차들을 보며 별채가 아니고 행랑채 같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몰러~ ㅋㅋ

 

전날 친구 M이 별나게 무섭다고 했던 이유가 따로 있긴 했다. 방 옆으로 난 문을 여니 아 글쎄 담너머 딴집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아니겠나.

 

이렇게... ^^; 

술 잔뜩 먹고 엉뚱하게 문 잘못 열고 나가면 그대로 허공으로뚝 떨어지며 낙상이다.

저렇게 내려다보이는 집에도 사람이 사는 것 같던데 윗집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도 은근히 신경쓰일 것 같았다.

 

이 문으론 허공이라 누가 들어올 리도 없는데 M은 상상력이 뛰어난 건지 전설의 고향 운운하며그래서 더 무섭다고... ㅋㅋ

 

 

 

 

 

 

암튼 안채 마당과 사랑채를 머뭇머뭇 구경하고 있자니 아주머니가 벌써 청소도구를 들고 나오셨고, 하회마을엘 가려면 택시타고 안동역으로 가서 버스를 타는 게 낫겠다는 아주머니의 조언 대로 우린 길을 나섰다. 버스 시간표도 미리 다 검색해서 적어갔으나 생각보다 하회마을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그리 자주다니지 않았다. 한번 놓치면 막 두시간씩 기다려야 해! 해서, 안동역 근처 간잽이 아저씨 식당에서 아점으로 고등어조림을 먹고야 말겠다는 나의 열망은 또다시 물건너가야했다. 10시 반인가 45분 버스를 못타면 2시간 뒤에나 하회마을행 버스가 있었다. ㅠ.ㅠ  그럼 찐한 커피라도 마셔 카페인 파워로 돌아다녀보겠다는 바람도 실천이 어려웠다.  역 주변인데도 그 흔한 프랜차이즈 빵집 하나 안 보이고 원두커피를 파는 편의점은 없었다. 너무 연해서 마시기 싫다고 했던 티백 커피라도 마시고 나올 것을, 아니, 고택 툇마루에 있던 자판기 커피라도 마시고 올 것을... 후회 막급이었다. ㅠ.ㅠ

 

안동 시내에서 하회마을까지는 한 40분쯤 걸렸나, 꽤 먼거리였던 느낌이다. 하회마을 입구엔 토속장터와 음식점이 자리잡고 있었고, 일단 거기서 우리도 아침을 먹었어야 했다. 하지만 오전이라 가게들은 아직 문도 열지 않은 것 같은 모양새라 쭈뼛거리던 우리는 일단 짐을 매표소 옆 사물함에 넣어두고 마을 안까지 들어가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거기도 입구에 밥집 있겠지 뭐;;;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오산. 예전에 이웃주민 포스팅에서 본 마을 입구 음식점은 그러니까 장터 입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던 듯, 마을에 들어서니 가게라곤 기념품과 음료수를 파는 간이매점 같은 곳 뿐이었다. 아이고 배고파라... ㅠ.ㅠ (다시 말하지만 나는 배가 고프면 손발이 후덜거리고 분노조절이 안되는 인간형이다. 그나마 배낭을 사물함에 넣어두고 카메라와 지갑만 들고 다니길 잘했지...)

 

잘 생긴 한옥들과 황토색 토담의 정갈함도 내 눈엔 잘 들어오지 않았고, 머릿속엔 온통 밥먹을 생각뿐! 미숫가루라도 먹으랴 물으니 친구는 빈속에 차가운 미숫가루는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집 할머니께 어디서 밥 좀 먹을 수 없겠느냐고 물으니 몇 군데 주소를 가르쳐주며 가보라고 했다. 밥을 해달라면 해주는 집이 있긴 한데, 문을 안열었으면 주인이 없는 거라는 하나마나한 설명과 함께... 흑... 정 밥집이 없으면 다시 돌아와 뜨거운 미숫가루라도 마시게 해달라고 부탁하곤 밥집 찾아 삼만리에 나섰다. 허나 미숫가루 집 할머니가 가르쳐준 주소는 둘 다 대문이 닫혀있을 뿐이고 ㅠ.ㅠ 하는 수 없이 우린 간이매점에서 강냉이를 한 봉지 사서 한움큼씩 집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주린 배를 바삭한 강냉이로 좀 달래고 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한옥 구경에 돌입했던 것 같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도 본 적 있는, 유명한 양진당에 들어서니 아저씨 한분이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계셨다. 원래도 공개된 공간 안쪽은 살림공간이고 사유지이니 출입을 금한다고 팻말에 적혀 있는데, 이날은  매우 중요한 제사가 거행되고 있으니 특히 조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 위함이었다.

(잘 보면 집안에서 쟁반 들고 바삐 오가시는 종부 어르신의 그림자도 찍혔다!) 

 

그러고는 친절하게 음력 9월 9일 중양절의 의미도 설명해주셨다. 본디 음력 8월 15일에 추석차례를 지내지만 그때는 시기가 일러 제대로 곡식이 다 익지 않았을 경우가 많고 음력 9월 9일에는 제대로 추수가 끝난 데다 음양이 조화롭고 더 길한 날이라 안동에선 제일 큰 제사가 있다나. 배를 타고 나갔거나 객사를 하여 정확한 제삿날을 모르는 모든 조상들을 위한 합동 제삿날이라고 했다. 호기심이 더욱 동하여 중문 안쪽을 기웃거리니, 정말로 도포자락 휘날리는 차림새의 어르신들이 여기저기 모여 계셨다.  

 

 

전날엔 왜 우리가 움직이는데 하필 비오고 날 추워져서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으면서, 바로 담날엔 중양절에 때 맞춰 잘 놀러왔구나 싶어져 키득거리다니 참 변덕스럽기도 하여라.

 

왼쪽은 양진당 행랑채에 딸린 마굿간. 여물통이 진짜 오래 되어 보인다.

 

 

 

 

 

 

 

평일인데다 갑자기 내려간 기온에 관광객이 많지 않아 아무래도 밥집 찾기는 글렀나보다 포기했을 무렵, 민박 팻말을 내건 어느 한옥에 유독 사람들이 드글거렸다. 알고보니 인근 공사중인 한옥 인부들이 매일 대놓고 밥을 먹는 듯했다. 어쨌거나 체면불구하고 들어가 할머니께 내가 물었다. 저희도 밥 좀 먹을 수 있을까요...? (굶주림은 얼굴을 두껍게 만든다는 진리!) 당연히 가능하나, 고등어구이와 안동찜닭 두 가지 메뉴만 된다는 기쁜 대답이 돌아왔다. 찜닭은 어제 먹었으니 무조건 고등어구이 백반!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달린 단칸방에 들어가 앉은 우리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날의 첫 밥상을 받을 수 있었다. 간잽이 아저씨네 식당의 고등어구이와는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우린 허겁지겁 맛나게 밥공기를 깨끗하게 비웠고, 칼칼한 된장찌개와 고들빼기 김치, 더덕 무침은 평범하게 느껴졌던 고등어구이의 맛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이 아니라 진짜로 맛깔스러웠던 반찬이었다고 인정. 들어갈 땐 몰랐는데 나와서 보니 <작전고택>이라고 팻말도 서 있었다. 잘 몰라서 그렇지 하회마을에서 고유한 이름 없는 한옥은 하나도 없는 듯;

 

 

 

 

 

 

 

 

 

속이 든든해지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도 더 새파란 것 같고, 토담 안에 줄지어 서 있는 기와집과 초가집들이며 텃밭에서 줄지어 자라는 배추들까지 죄다 한층 더 정겨워보였다. ^^;    

 

들어가지 말라는 곳엔 왜 더 들어가보고 싶은지;; 저 멀리 안채 처마에 매달린 곶감은 또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굴뚝 하나도 그냥 쌓아올리지 않은 정성과 예술감각을 보라!

 

 

걸어가면 왕복 한 시간도 넘게 걸릴 거라는 병산서원 가는 길.

하회마을에서 나가는 시내버스 시간에 맞추려면 우리 걸음으론 무리라는 결론으로 포기하며 바라보니 어찌나 아쉽고 오솔길이 더 예뻐 보이던지. 도산서원도 못보고 병산서원도 못보고 이것 참... 반쪽짜리 안동여행일세.

(알고 보니 도산서원은 안동시내를 중심으로 하회마을과 완전 반대편에 있었고, 시내에서 그쪽으로 가는 버스편도 하루에 몇번 되지 않았다. ㅠ.ㅠ)

 

 

 

 

 

 

 

 

공터에 나타난 그네도 한번 타주시고, 친구가  대뜸"시소다!"라고 외친 널뛰기 널에도 한번 올라가주며, 마을을 거의 다 한바퀴 돌고 나니 보이는 것은 부용대 절벽과 솔숲.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뻗어있는 예쁜 오솔길. 저 길을 우리도 하염없이 걸어가고 싶었으나...

버스시간에 맞춰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

양쪽 나무가 머리를 맞댄 이 길 역시 좀 걷다가 돌아서야 했다.

 

관광철이 아니라선지 부용대 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나룻배도 없고, 그렇다면 이젠 미숫가루나 먹으며 다리를 쉬어야 할 때. ^^;

 

 

 

 

 

 

 

 

미숫가루를 먹으러 들어간 방에서, 자기도 이런 예쁜 찻상 갖고 싶다며 친구는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마침 친구S의 남편은 목공예가 취미인 사람. 생일선물로 만들어준 화장대겸 원목 책상을 나도 익히 본 적 있었다. 아마 다음번에 친구네 놀러갔을 땐 거실에 이런 야트막한 찻상이 놓여 있을지도...

 

 

한여름에 먹었으면 더 맛있었을 얼음 동동 띠운 미숫가루의 위용. ^^;

 

여행일정은 우리가 세운 계획이 아니라 전부 다 버스 시간표에 달려있음을 그제야 깨달은 우리는 5시쯤 하회마을을 떠나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괜스레 하회탈 박물관에 들어가 별로 볼 것 없는 구경도 하고, 그곳 매점에서 드디어 그날의 첫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때우다 안동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하회마을은 원없이 구석구석 돌아보았으나 병산서원, 도산서원 못 본 것을 안타까워 하며...

(2012. 10. 23)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