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더러운 세상이라고 욕하고 싶은 꿀꿀한 분위기를 털어버리는 데는 뭐니뭐니해도 팔불출 고모노릇이 최고다. -_-'; 댓글 수로도 드러나는 지우 그림의 인기에 힘입어 그간 모아둔 조카들의 구김살 없는 그림을 대거 공개할 작정이다. (방문자 많은 거 싫다면서 결국 흥행에 신경쓰는 것 좀 봐라 ㅎ) 연도별로 꼬박꼬박 컴퓨터에 스캔해 두거나 찍어둔 조카들의 그림 폴더를 새삼 열어보며 느낀 행복과 흐뭇함을 이웃들에게도 나누고 싶다는 건 표면적인 이유고 솔직한 이유는 그렇다, 그냥 달리 내세울 게 없는 인간의 팔불출 자랑질이다. ^^;; 이런 자랑질 불편하고 귀찮은 분들은 패스하시라고 접어둔다.
조카들 넷 중에 셋이 돌잡이에서 모두 연필을 잡았는데, 애들은 원래 제일 익숙한 물건을 잡는 것이 보통이라는 속설이 조카들의 경우엔 맞는 것도 같다. 특히 첫 조카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우리집에서 보냈기 때문에 기어다니다가 막 일어설 무렵부터 그림책 읽어주기와 더불어 종이에 그림 그리기를 내가 주도했다. 그게 과도해져 벽이나 방바닥에 거침없이 낙서를 해놔도 나는 그저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해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벽화잖아! 라고 반색하면서.
암튼 그 때문인지 타고난 DNA가 남달랐는지 그건 알 수 없으나, 찍찍 선을 그어대는 낙서와 동그라미 세모 그리기가 지나고 서너살이 되면 나의 조카들은 곧잘 인물화를 그려냈다. 천편일률적이기 일쑤인 어린아이들의 인물화와 달리 각자의 개성을 간파하여 거의 캐리커처처럼 그려내는 정민공주 솜씨에 나는 그야말로 펄쩍펄쩍 뛰며 흥분했다. 헌데 하루에도 스케치북을 서너권씩 써버리는 속도가 두렵고 종이가 아까워 이면지를 주로 사용했던 초창기 그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
<4세 고은반>이라고 적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정민공주의 첫작품이다. 크레파스로 밑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빨간색 풀을 덮은 뒤 손가락으로 쓱쓱 그렸다. 유치원에서 전시했던 걸 나중에 집으로 가져왔었는데, 저렇게 나날이 풀이 말라 떨어져 버려 결국엔 몇년 전에 버려야 했다. ㅠ.ㅠ 제목은 <엄마>라고 추정. 2001년도 작. 4세라지만 생일이 12월 말이라, 실제 만나이는 30개월 정도였을 거다. 사직을 찍을 당시에도 이미 저리도 많이 훼손된 상태지만 그래도 공주 특유의 시원시원한 필치(?)는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련다. ㅋ
아래의 스케치 6장은 공주가 다섯 살 때, 어느 여름 날 우리 집에 모인 식구들이 돌아가며 줄서듯 졸라댔더니, 몹시 귀찮다는 듯이 장당 30초쯤 걸려 쓱쓱 그려 준 작품이다. 내가 모아두기 시작한 공주의 첫작품들이기도 하고... 이면지에 볼펜으로 대충 그린 이 그림을 스캔해서 널리 자랑했을 때 모두들 내 의견에 동감해주었다. 얘는 천재화가소녀가 틀림없어! 라고. ^^;
[고모] 즉 나라는 얘기 ^^
[아빠] 투실투실 살찐 아빠!
[엄마] 동글동글한 느낌이 딱
[할머니] 꼬불꼬불 파마머리 ㅋ
[할아버지] 대머리와 안경에 주목
[강아지] 이땐 주변에 강아지 없었다
모두 이면지에 볼펜으로 그린 걸 스캔해서 상태가 별로 선명하질 않다. -_-a 암튼 꼭 콧구멍을 그려넣은 것이 당시 그림의 특징이다.
셋 다 2003년, 여섯 살 때 작품이다. 좌: 3월. 작품명은 [고모]. 내가 미용실에서 바람머리를 하고 온 날 기념으로 그려주었다. 초창기 블로그 대문사진으로 쓴 적도 있을 만큼 아끼는 작품인데 원본은 막내고모한테 넘겼다. 하도 탐내 하셔서... ㅎㅎ 중: 10월. 이 무렵은 공주가 어디나 마구 그림을 그려댔다. 작품명은 [참새]. 이제 보니 장욱진의 새 그림을 닮았다. 우: 2월. (순서 바꾸기가 안된다 ㅠ.ㅠ) 누구를 그렸는지 모름. 공주네 식구가 다녀간 어느 주말, 방문에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언제 그림을 그려 풀칠까지 해놓았는지... 하도 테이프질, 풀칠을 많이 해놓아 떼다가 그림은 찢어지고 사진만 남았다.
역시 2003년, 6세 때 작품들. 좌: 11월. 유치원에서 전시했던 작품을 찍은 건데 교사의 가필이 들어갔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창호지에 물감으로 어떻게 저렇게 완벽한 선을 그렸을지 의아하긴 하다만 진짜 공주의 단독 작품이라면 천재가 분명하다고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작품명은 [고구마 줄기] 중: 사진을 11월에 찍어왔음. 집에 가보니 공책에 그려놨더라. 작품명은 둘 다 [자화상] 왼쪽 그림의 분홍색 줄은 줄넘기란다. ^^ 우: 12월에 사진 찍음. 작품명 [자화상]. 다리의 길이를 달리해 달려오는 듯한 아이 모습이 인상적이다
좌: 2004년 8월 7세때. [무지개 포도] 이날 내게 줄 선물로 스케치북 한가득 그림을 그려가지고 왔었는데 그중 엄선했다. 중: 2004년 12월 [코끼리]. 백화점 문화센터로 그림을 그리러 다닐 때다. 창호지에 물감 채색인데 코끼리가 상당히 '벌'스러운 것이 특징. ^^; 마침 할머니가 두달째 입원중이셨는데, 그림 들고 문병와서 할머니 힘내시라고 병원 침대 위에 붙여놓았을 때의 사진이다. 환자보다는 오히려 꼬박 두달간 간병무수리하던 나에게 더 용기를 북돋아준 그림. 우: 2005년 11월. 초등학교 1학년 8세 때다. 좀체 그림을 그리지 않다가 고모할머니의 전시회에 다녀와서 그날 일기장에 그린 그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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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막내고모의 작품인데, 가운데 그림을 기억해서 따라 그린 모양이다. 사진이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데 그림 배경에 모두 금가루와 하얀 점들이 박혀 있다.
2007년 3월에 찍은 사진. 공주가 3학년, 10살 때다. 현재 이 그림은 액자에 들어 왕비마마 거실에 걸려 있다. 그림을 그릴 당시 (2월일지도 모르겠다) 왕비마마가 또 한참 입원해 계셨는데 꽃 좋아하시는 할머니 그림 보고 힘내시라고 정민이가 선물했다. 이 작품 이후로는 정민이가 우리에게 그림 자랑을 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도 고모할머니한테 그림을 배우러 다니고는 있지만, 예전과 달리 좀처럼 작품 자랑을 하지 않으며 감추려고 하는 느낌이다.
오른쪽 사진은, 역시 공주 10살 때. 9월에 열린 고모할머니의 그룹 전시회 <이면전>에 오브제 모빌 작품으로 조카들 셋(아기였던 지우 빼고)이 모두 함께 참여했었다. 자칫 잘못 보면 손가락 욕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포에 그린 모빌 작품을 잡고 있을 뿐이다. ^^; 조카들이 서너 개씩 그린 그림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드리워졌던 이 모빌은 전시회 철거 후, 고맙게도 일부가 나에게로 와 현재 작업실 방문 앞에 매달려 있다.
2008 4월. 11세때. [아기도깨비]
이후 공주의 그림들은 점점 캐릭터 팬시 상품처럼 변해갔다는 후문이다. 왼쪽 사진은 공주의 작품 사진 폴더에 들어있는 가장 마지막 작품으로, 도자기를 빚어 거기에 그림을 그렸다. 채색 슬리퍼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지환이 작품 소개할 때 같이 공개할 작정.
놀라운 천재적 기질이 아직 공주의 머릿속에, 손끝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다고 늘 이야기하며 용기를 북돋고는 있는데, 초등학교 6년간 공주는 이런 솜씨로도 그림 관련 상을 단 하나도 받아오지 않았다. 천재를 몰라본다고 처음엔 마구 분노했는데, 알고보니 학교에 작품을 제출하는 일 자체가 아주 드물었다. 마음에 안든다며 중간에 북북 찢어버리거나 집으로 가져왔다가 미완성인 채로 결국 내지 않는 식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엔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장 즐거운 놀이였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우리로선 알 수 없다. 물론 나는 언제고 공주의 천재 화가 잠재성이 다시 발현될 것이라 믿으며 묵묵히 기다리자고 마음먹었으나 조바심이 나는 걸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포스팅을 하면서 흔들리는 믿음을 다시 굳히기로 했다. ㅎㅎㅎ
* 폰카로 찍은 사진들도 있어 상태가 조악하지만 그래도 그림은 클릭하면 거의 다 크게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