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를 옮긴 중앙박물관엔 그간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림을 보는 건 좋아하지만, 세월을 박제해 놓은 듯한 박물관 전시실의 느낌은 어쩐지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는 편견 때문에 선뜻 나서질 않게 된다. 따져보니 마지막으로 국립박물관에 가 본 것은 십수년 전 회사를 다닐 때 거래처에서 온 영국인의 휴일 소일거리로 따라갔던 듯.
어쨌든 용산에 새로 생긴 국립중앙박물관은 꽤 잘 지어놓은 것 같았다. 워낙 넓어서 다 돌아볼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고 페르시아 전시관만 쉬엄쉬엄 둘러보고선 다리가 아파 음료수 한잔씩 사들고 한참이나 앉아 있다 돌아와야 했다.

페르시아 제국 전성기의 화려한 유물과, 언뜻 보기에 우리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선사시대의 토기와 청동기 유물들은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결국엔 패자의 역사라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조명하는 것이 좀 슬펐다.
작년엔가 로마제국이 멸망시킨 주변 약소국가들을 조명한 책을 번역했는데, 막 꽃피기 시작했던 수많은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들이 로마군에 짓밟히지 않았다면 또 어떤 역사가 이루어졌을지 상상하면서 읽고 옮기는 패자의 역사가 안타깝고 서글펐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 알아본들 또 무엇 하겠나 싶긴 하지만, 이런 전시회를 다녀오면 세계사 공부를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교과서엔 아주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는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사산왕조, 다리우스 왕, 실크로드를 건너 신라와도 교역을 했다는 그들의 눈부신 문명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긴 하지만, 이런 생각이 얼마나 갈지는 잘 모르겠다. ㅋㅋ

3천원을 내고 전시 오디오 가이드를 빌릴 수 있기는 한데, 전시 순서와 가이드 내용 번호가 뒤죽박죽이고 녹음된 설명도 전시 안내문과 똑같은 게 대부분이라 약간 짜증스러운 반면 도슨트의 설명이 훨씬 더 재미있고 , 광범위하다. 도슨트를 따라 그리 넓지도 않은 전시실을 다 돌려면 1시간 반은 족히 걸리는 듯. 설상가상으로 오디오 가이드 이어폰이 요상하게 생겨먹어서 귀가 아프니, 이왕이면 도슨트의 무료 설명을 듣는 게 백배 낫다.

GS 칼텍스 보너스 카드로는 2천원이 할인되는 것 같던데, 치사하게 다른 시립 미술관은 무료입장이 가능한 65세 이상도 3천원권을 끊어야 하고 다른 할인은 적용이 안된단다. 초대권이 3장밖에 없었지만, 울 엄마는 당연히 공짜일 줄 알고 모시고 갔다가 슬쩍 부아가 치밀었다. 시립미술관 세운 서울시보다 국립박물관 세운 나라가 더 가난하다는 뜻이냐 뭐냐. 기획전시라 성인 입장료가 만원씩이나 하는데, 아마 초대권이 아니고 쌩돈 들여 가야하는 상황이었다면 애써 찾아가진 않았을 테지만 보러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전시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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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란의 국보 1호라고 할 수 있다는 황금 뿔잔. 뿔모양의 크고 작은 황금잔들이 참 많았는데, 저기에다 술을 마시면 얼마나 맛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 옛날에 금을 얇게 두들겨 저렇게 정교한 조각을 해냈다는 게 놀랍기도...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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