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하나마나 푸념 2008. 4. 24. 16:41
"심상정, 노회찬 후보 다 떨어지면 나 이민 갈 거야! 이 나라엔 희망이 없어."
지난 총선때 엎치락뒤치락하는 개표방송을 보며 내가 엄마한테 외친 말이었다.
어딜 가도 한국인으로서 한국만큼 살기 편한 나라는 없다(언어 하나만 따져도!)는 나의 지론을 익히 알고 있는 엄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디로 가려고?" 라고 물었다. 막상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간 <이민>은 누가 등떠밀어도 안간다는 것이 나의 근본적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기세가 한풀 꺽인 목소리로 나는 "뉴질랜드에나 가지 뭐. 심심하긴 하겠지만..."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물론 뉴질랜드에서 나를 받아줄 것인가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이민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당연히 없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또는 더 나은 삶을 계획해보려 한다거나 이 나라에 환멸을 느껴서 이민을 작정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과거의 나는 그들을 안쓰러워하거나 콧방귀를 꼈다. 열악한 어린이캠프 화재로 유치원생 아이를 잃은 부모가 배신감과 상처를 감당 못해 이민을 결심했다거나 용인 서해교전 희생자의 부인이 전사한 남편에 대한 처우가 불합리하다며 나라를 등지고 떠난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에도 오죽했으면 낯선 곳으로 떠날 결심을 한 그들의 참담한 마음이 안쓰럽긴 했어도, 이민가서 그들이 행여나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겠나 의아스러운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돈이 엄청 많아 싸짊어지고 간다면 모를까, 말 설고 물 설고 문화도 다른 그곳에서 기껏해야 차별 받으며 살아야 할 터인데 왜들 그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샌 <오죽했으면> 가난한 신세로 이민을 결심했을 그들의 마음에 차츰 더 동화됨을 느낀다.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나라를 기업 경영하듯 휘두르겠다며 스스로 CEO임을 자처한다. 기업의 최대 목표는 이윤 추구이니, 이윤을 남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소리다. 기업 중심의 구조조정, 비정규직 양산,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무한경쟁체제 돌입 같은 웃기는 짓거리를 전국민 대상으로 해치우겠다는 심보다. 정부가 내세우는 제도들 또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자율의 이름으로 어린 학생들을 말려 죽이거나 잡아먹을 태세다. 공교육을 강화하고 사교육 열풍을 잠재우겠다면서 어떻게 정반대의 정책을 남발하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다. 놈들의 뇌는 머리 속에 든 게 아니라 발가락 사이에 때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일까? 질 좋고 값싼 광우병 쇠고기를 국민들에게 널리 대접하겠다는 정신나간 대통령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소값이 떨어지고 농민들은 헐떡거리는데 설상가상으로 조류독감에 걸린 닭과 오리들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만 마리씩 산채로 땅속에 묻히고 있다. 오염된 침출수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제는 차라리 엄살처럼 들린다. 하기야 수십, 수백억씩 재산 많은 인간들이 돈없는 서민의 마음을 어찌 알겠나. 어차피 너도나도 땅값, 집값 올려 돈 좀 만져보겠다는 얕은 야심에 눈이 어두운 국민들이 아닌가. 투명경영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당연하게 비자금 만들고 재산 빼돌리며 승승장구해 온 재벌 삼성 비리는 확실한 증거를 특검 손에 쥐어주었는데도 변죽만 건드리다 결국 무혐의란다. 지나던 개가 웃을 일인데, 삼성 망하면 나라 망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우국충정들의 결집된 힘이 참 놀랍긴 하다.  

원래부터도 정치에 별 관심 없었고 애국심이니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이니 하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었지만, 요새 같아선 김연아와 박태환이 아무리 멋지게 태극기를 휘날려 주어도, 박지성이 맨유에서 아무리 잘 뛰어도 그들 때문에 이 나라가 덕본다는 생각보다는 걔들이 더 좋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모름지기 희망이란 앞으론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꿈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이 나라 꼬락서니는 그야말로 점입가경,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아니지, 있는 놈들의 견해로는 발전이되 속으로는 곪아터진 겉다르고 속다른 사기공화국으로 치닫고나 할까.

허나 더욱 서글픈 건 내가 이렇게 욕을 해대면서도 버리고 떠나고 싶어도 도저히 능력이 없어서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스란히 이 땅에서 더러운 분탕질을 지켜보거나 겪으며 살아야한다는 게 참 짜증나고 서럽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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