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고흐전

놀잇감 2008. 1. 21. 21:42
벌써 한참 된 일인데 새삼 포스팅을 결심한 건 어제 오늘 너무 우울하고 짜증이 나
생각만 해도 미소를 머금게 되는 일을 떠올릴 필요가 있어서다.
그리고 방학중 전시장을 찾을 계획을 하고 있을 블로거들을 위해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

내가 두번째로 고흐 전시회장을 찾아간 건 1월 10일 목요일 오전.
매주 수요일 오전엔 유치원생들의 무료 단체관람이 있다는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평일 오전엔 설마 무료 단체관람객이야 없겠지 나름 짐작했고,
방학중 가장 아이들로 붐비는 시간은 오전 학원수업이 끝난 아이들을 엄마들이 이끌고 모여드는
오후 2시에서 5시 사이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아.뿔.싸.
조카들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나기로 했던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티켓박스 앞엔 비닐 천막 안이 꽉 차도록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마당 한 가득 여기저기 수십명씩 떼지어 몰려온 유치원생 및 초등학생 단체 관람객이 구름처럼
우글거렸다. ㅠ.ㅠ

나 역시 어린 조카들과 함게 하려는 관람이긴 했지만
한둘씩 아이들을 동반하고 다니는 관람객과 수십명씩 떼지어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내는 소음(논두렁에서 개구리들이 한꺼번에 울어대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리지 않다)은 천양지차임을
과거 샤갈 전시회때 경험했기 때문에 너무도 난감했다.
게다가 노구를 이끌고 실로 수십년만에 광화문 정동길에 납시신 우리 왕비마마를 대동한 터라
그림을 보기도 전에 아이들에 치여 지쳐선 안된다는 불타는 사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우리는 일단 와글와글 시끄러운 어린이 단체관람객을 일단 앞세워 들여보낸 뒤
투터운 옷가지와 가방들은 사물함에 넣어두고 가뿐한 차림으로(사물함 비용 100원은 나중에 도로 나오므로 결과적으로 무료다^^) 전시실로 올라갔다.
다행히도 시끄러운 아이들은 '단순히' 숙제를 위해 온 것인듯 그림 자체는 감상을 하는둥 마는둥
저마다 수첩을 꺼내들고 뭔가를 신나게 베껴적고는 메뚜기떼 사라지듯 물러났고
우리가 2층 전시실을 둘러본 뒤 일단 카페로 철수해 카페인과 당분으로 피로를 풀고 돌아와
3층 전시실을 돌 무렵인 오후 12시 반쯤엔 전체적으로 한가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초기 스케치 작품과 함께 고흐의 생애를 조망한 짧은 필름 상영을 하는 곳 역시
붐빌 때는 볼 엄두도 못내는데, 한 타임 기다렸다가는 이내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을 정도.
또한 가장 큰 전시실인 생레미 시기와 오베르 시기 그림이 걸린 곳에선
중간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멀리서 사람들 어깨와 머리 너머로 보이는 고흐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났다.

이번 고흐 전시를 최대한 실망하지 않고 보려면 3층에 있는 초기 스케치화와 고흐 생애 영상물을
먼저 보라는 조언도 있다는데 계단 오르내리기와 걷기를 몹시도 싫어하는 내 관점에서 보자면 ^^
그냥 2층 전시실을 순서대로 돌고
3층에 올라와 생레미 시기를 보기 전에 구석에 있는 초기 스케치화와 영상물을 본 뒤
생레미 시기와 오베르 시기로 대미를 장식하고 아트샵에서 진짜 작품 대신 복제품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든지
성에 안차는 대로 기념 소품을 장만하면 나름대로 뿌듯한 관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번 관람에서 유독 짜증스러웠던 것은
평일 오전에 부지런을 떨었는데도 어린이 단체관람객과 맞닥뜨렸다는 것 이외에도
입장료 할인혜택이 있는 GS 칼텍스 보너스카드의 사용이 원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째뜬... 할인 얘기 하면서 또 짜증이 떠오르긴 했지만
두번째로 고흐 그림들로 가득찬 전시실을 작품 순서와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감상하고, 그림에 낯선 엄마와 조카들에게 아는 만큼만 알량하게 설명을 하고
또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림을 쳐다보며 오디오 가이드에 귀를 기울이는 정민공주를 지켜보는
마음은 참으로 흐뭇했다.

수많은 그림 가운데서 어느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드냐는 나의 질문에
정민공주는 뜻밖에도 <비탄에 젖은 노인>을, 지환왕자는 '파란꽃', 즉 <아이리스>를 골랐는데
공주는 슬퍼하는 노인 그림이 제일 잘 그린 것 같기 때문이고, 왕자는 파란 꽃이 제일 예뻐서라고
대답했다. ^^
아 참, 울 엄마는 제일 인상적인 그림으로 <자화상>을 꼽으셨고, 올케는 샤갈 전시회 때만큼 가슴 설레는 감동이 없긴 해도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애틋했다는 총평을 했다.
가족을 대동하고 전시회를 찾는 일, 조용한 관람을 원했던 과거의 나 같은 까탈 관객에겐 괴로운 일이겠지만
색다른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다.

암튼...
제 아무리 방학이라 해도 한가한 오전 미술관을 상상하며 11시 도슨트 설명을 기대했건만
이번에도 도슨트 설명은 듣지 못했다. 오디오 가이드와 내용이 똑같은지 어떤지 한번 꼭 들어보고 싶은데...
다음엔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기필코 한가한 때를 노려보리라.
그 전에 "고흐 전시회를 꼭 구경가야겠다"는 준우왕자를 대동하고 전시장을 또 한 번 시끄럽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지만..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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