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반도

하나마나 푸념 2007. 12. 10. 16:36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정민공주가 함께 떠오르질 않는 걸 보면
아마도 큰동생이 결혼한지 얼마 안 돼 정민공주가 올케 뱃속에 있거나 아예 생기기도 전이었을 때의 일인 듯하다.
주말에 우리 집에 다니러 와서 TV로 뉴스를 보던 올케가 돌연 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흑흑 흐느꼈다.
그때 나오고 있던 뉴스는 원유 유출 사고 현장 취재였고
기자가 시커멓게 기름에 쩔은 바다새의 배를 누르자 새 입에서 검은 원유가 울컥울컥 새어나왔다.
올케는 그 모습을 보고 새가 너무 가여워서 "어떡해... 어떡해..."라고만 하며 울었던 터였다.

올케가 워낙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는 퍽 놀라워하며
죽어간 바다새를 새삼스럽게 안타까이 바라보았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새를 무서워하는데다 죽은 새는 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 거기다 끔찍하게 검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은 모습을 보는 것이 꺼려져 슬쩍 TV를 외면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사상 최대의 원유유출 사고를 전하는 뉴스를 매일 접하며
나는 차마 화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오래 전 눈물 많은 새댁이었던 올케의 모습을 대신 떠올렸다.
방재작업에 나선 사람들과 망연자실한 어민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눈물겹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사고로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는 이 상황이 짜증스럽고
속상하다.

태안반도는 내가 태어나 처음 바다를 만난 곳이다.
여덟살 쯤이었던가, 난생처음 바다의 짠물과 결 고운 모래사장과 썰물 때 드넓게 드러나는 신기한 바닥과 굴을 따먹는 재미를 나에게 일깨워준 곳이었던 만리포는 이번 사고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다.
몇년 전까지 여름마다 찾아갔던 한적한 학암포 해수욕장도 역시 태안반도에 있다.
만리포가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모래사장으로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남아 있다면,
학암포는 서해안도 물이 맑아 바닷속이 들여다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중한 해변인데 앞으로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덜컥 겁이 난다.
생각해 보니 학암포 해변에 드러누워 바다를 지켜보고 있으면 가끔 놀랍도록 커다란 배가 근해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던 것 같다. 그땐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라 여기며 언짢아 했었는데 그때 그 배도 유조선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뉴스에서 매일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나로서는 서해안 생태계에 과연 얼마나 피해가 갈 것인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막연한 공해 걱정과 추억의 장소에 대한 안타까움은 당장 생계가 막막해졌을 피해 어민들의 억울함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푸념일 게다.
시커먼 기름이 밀려온 해변을 얼핏 볼 때마다 나도 이렇게 가슴이 막막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데
직접 닥친 사람들은 오죽할까.
나오느니 한숨뿐이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터져나오는 이런 사건은 제발 안 겪고 살순 없는 걸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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