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흐...

놀잇감 2007. 11. 28. 00:47

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조금씩 설레기는 하지만
이번 고흐 전시회는 거의 봄부터 기다렸던 까닭에 마치 헤어진지 오래 된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 들 만큼
가슴이 콩닥콩닥 설렜다.

쌀쌀하긴 해도 발밑에 뒹구는 낙엽만은 여전히 가을 분위기 물씬 풍기는
정동길을 걸어 시립미술관 언덕을 오르니
어찌나 마음이 뿌듯하던지...

미즈키님이 귀띔해준 덕분에 천원 할인도 받고 예매 선착순 만명에게 준다는 샤갈 소도록을 두 권이나
받았으니 또한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었으나 ^^;
현장에 가보니 GS칼텍스 보너스 카드가 있으면 4명까지는 천원 할인이 되고 포인트가 있으면 2천원까지도
할인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미리 확인했던 대로 전시관은
네덜란드 시기와 파리 시기, 아를 시기, 생레미 시기, 오베르 시기로 나뉘어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27세에서 불운한 생을 마감한 37세까지의 인생을 조망해 놓았는데
맨 마지막 전시관엔 초기작인 드로잉 작품으로 마무리 되어
어쩐지 끝이 밋밋한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만일 다음 관람 계획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인상주의 화풍이 극대화된 아를 시기와 생레미 시기의 작품들을
몇 번 더 둘러보아 눈과 마음의 호사를 좀 더 마음껏 누렸을 것이다.

이번 전시의 감동은 역시나 고흐의 작품과 삶을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일 텐데
고흐의 새파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한 느낌이었던 자화상을 접하고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약간 뜨거워져 당혹스러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화상] 1887년 파리.종이에 유채. 네덜란드 반 고흐 박물관 소장

무척 나이들어 보이는 이 자화상은 고흐가 '겨우' 서른네 살 일 때 그린 것이다.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화구와 캔버스로 그림을 그린 탓에 고흐의 작품들은 대작이 거의 없다.
옆 작품들에 비해 몹시 크게 느껴지는 <아이리스> 그림의 높이가 1미터도 안될 정도이고
이 자화상이나 <밀 이삭> 같은 그림은 정말 아담하다.
그럼에도 작고 소박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화폭이 점점 커져 나를 압도하며 빨아들이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고흐에 대한 나의 편애 이유에는 아름다운 색채와 꿈틀거리는 유화의 질감 외에도
분명 그의 지난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게 작용한 것이 틀림 없다.
작품 설명에도 나와 있었지만 화가를 괴롭혔던 극심한 조울증과 광기는 그림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물며 생레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린 그림들도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그의 삶에 구원이었듯이, 여전히 그의 그림들이 여러 사람들의 고달픈 삶에 구원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더욱 사랑받는게 아닐까.
아무튼 나는 오늘도 고흐의 노란색과 연두색과 다채로운 파란색의 향연 속에서 막연한 슬픔과 함께
훨씬 더 큰 감동과 행복을 맛보았다.
고흐의 작품들은 단순히 미술관에 대한 문화적 허영심을 채우는 것 이외에도 분명 내 영혼을 푸근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을 지녔다. 물론 나 혼자만의 편애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려나
제 아무리 뛰어난 인쇄술로 찍어낸 화집이나 도록이라 해도
역시 원작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은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음을 미술관에 갈 때마다 깨닫는다.
<아이리스>의 노란 바탕은 그야말로 내가 고흐와 함께 제일 먼저 떠올리는 따뜻한 노랑색이었고
<프로방스 시골 야경>의 아련한 별빛과 달빛은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으며
<생레미 정신병원의 정원>에 피어난 5월의 꽃과 신록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화사해졌다.

문제는 고흐 그림의 경우 보면 볼수록 더 욕심이 생긴다는 점이다.
고흐의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있을 유럽 미술관 순례는 물론이고(게다가 몇몇 주요 작품들은 미국에나 가야 볼 수 있으니 오호 통재라) 그가 생애 마지막의 70일을 보냈다는 오베르의 소박한 골목길과 밀밭,
그리고 밤의 카페 테라스가 있는 아를에 가고싶어서 몸살이 날 것만 같은 마음으로
휘적휘적 돌아왔다.

너무 원대한 욕심은 일단 접어두고
조만간 다시 전시회 보러갈 날짜를 고민하며 어렵사리 고른 엽서 3장이나 또 쓰다듬어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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