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인사의 학벌 위조로 시작된 사회적 파문이 정말 끝이 없다.
어떤 이는 수사의 대상에 올랐고
어떤 이는 외국으로 떠났고
어떤 이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 거짓이든 아니든 눈물의 참회를 하고 있다는데
이어지는 폭로와 고백을 계속 지켜보기가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뿐인가 이젠 조직적으로 정부측에서 비인가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 버젓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학벌 사기꾼들을 색출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니
정말 투명하고 정직한 '학벌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건 좋지만
점점 마녀사냥을 닮아가는 분위기가 이 나라 전반으로 퍼져가고 있나 보다.

며칠 전 지인의 뜬금없는 전화를 받았다.
XXX라는 사람을 아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늙다리 대학원생이던 시절, 미국 대학에서 유학중이던 XXX가 방학동안 귀국했을 때 인사를 나눈 정도라고 했더니 지인은 대뜸 그가 다닌 학부가 '본교'인지 '분교'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나야 학부는 전혀 다른 대학을 다닌 사람이고 학번 차이도 워낙 커서 잘은 모르지만
'본교'인듯 했다고 대답했더니 확실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_-;;
학교마다 거의 다 마찬가지겠지만 타학교 학부 출신은 물론이고 '본교생'과 '분교생'에 대한 차별과 선입견도 꽤 큰 것이어서,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출신'이 어딘지는 은밀하게 쑤근댈 근거를 제공하는 꼬리표로 인식되는 듯했었다.
내가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누구는 타교 출신이고 누구는 분교 출신임을 저절로 알게 되었으니까.

나중에 알고보니 사연인즉,
XXX라는 사람이 최근에 어느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그 대학 강사들 사이에서 XXX가 본교가 아닌 "분교 출신"이라는 소문이 횡행하고 있어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였다.
내가 알기로 XXX는 꽤 괜찮은 미국 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으니, 최근 몇년은
교수 임용을 위한 필수 코스라 할 수 있는 '강사 생활'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우스운 건 그의 학벌에 대한 의심의 이유였다.
그의 아내가 같은 학교 '분교 출신'이라는 것. -_-;;;

학벌 파문이 이토록 시끄러운 와중에, 설마 자격도 없는 사람을 떡하니 영문과 교수로 임용시키지는 않았을 터인데도 단지 아내가 같은 학교 '분교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무조건 그의 출신 성분을 의심하고 '자체 진상 조사'에 들어간 그 동네가 몹시 무서웠다.
비인가 대학의 학위로 버젓이 교수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어느 학교든 교수임용 과정에서도 권력의 비호나 비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교수 임용 과정의 최종 단계에 같이 올랐던 자격 있는 인사의 논리적인 반발이나 양심선언도 아니고 단지 부인이 분교 출신이니 남편도 분교 출신임에 틀림없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얘기는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설사 그의 학부가 '분교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적절한 절차를 밟아 대학원을 다니고
외국에서 학위를 따고(사실 영문과는 미국 대학 학위만 권위를 인정하는 못된 편견이 심하기도 하다)
또 교수임용 자격에 준하는 논문도 발표하여 정식으로 선발된 교수라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XXX가 교수로 뽑힌 그 대학출신의 경쟁자 강사들은
감히 '타대학 분교 출신'이 임용되었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사건은 씁쓸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 듯하지만 (나야 중계방송만 들었으니 실제 속내는
알 수 없다) 나로선 잘 알지도 못하는 XXX가 혹시라도 학교에 그런 소문과 분위기가 돌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이 어떨까 괜스레 안타깝고 찝찝하다.
부디 말 많은 동네에 잠시 떠돈 헛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전해지진 않길 바랄 뿐이다.

이렇듯 내 주변까지 파고든 학벌 사기꾼 사냥의 열기를 새삼 경험하며
결국 온 나라를 몇달째 뒤흔들고 있는 가방끈 파문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건, 가방끈 화려하고 긴 자들의 사기꾼 색출작전이 아닌가 말이다.
감히 거짓 탈을 쓰고 권위의 아성에 끼어든 보잘것 없는 존재들을 단죄하겠다는 그들만의 리그에 우린 괜히 덩달아 춤추고 있는 건 아닌지?

학벌 위조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이유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학벌 위조로 큰 이익을 누렸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들의 학벌이 비천하고 낮기 때문인지 돌아봐야 한다는
며칠 전 누군가의 주장이 자꾸 가슴을 친다.
 
기회와 돈만 있다면 너도나도 외국 유학을 떠나 학위를 따오고 싶어 하고,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고도 좀처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실업율 최고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괘씸죄가 적용된 게 분명한 이 사회적 파문은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돌을 던질 자유가 없음을 역설적으로 시사하는 게 아닐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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