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와 하늘이

양양연진 2022. 3. 17. 15:46

연이는 지난 겨울 혹한을 잘 넘겼다. 난생 처음 지내는 겨울일 테니 영하11도가 넘는 날은 핫팻을 겨울집에 넣어주기도  했지만, 적응력을 높이는 게 좋다는 조언도 있고 해서 결국 박스째로 사들였던 캠핑용 대형 핫팩은 다 쓰지 못하고 남았다. 다시 겨울이 찾아오기까지 안 굳고 잘 남아 있을까. ㅎㅎ

암튼 연이의 성별은 암컷이었던 모양이다. 2월 중순 연이는 이상하게 괴로운 소리를 내며 발정기 울음을 시작했다. 얼마 전만 해도 봄가을에 밤마다 울어대는 발정기 고양이들 울음 소리에 엄청 욕하고 싫어했던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발정기 암컷이 우는 건 너무 배가 아파서라니 ㅠ.ㅠ 안쓰럽고 짠해서 빨랑 발정기가 지나가길 빌었다.

물론 걱정도 많이 했다. 발정기 울음을 듣고 수컷이 찾아오면 사료랑 물이랑 뺏기는 거 아닐까? 겨울집=연이 보금자리가 바로 내방 창밖에 있는데 인간의 소음과 너무 가까운 곳이라 짝짓기가 가능할까? 별별 걱정이 다 들었던 것이다. 암튼 아으~아으~ 괴롭게 울어대던 연이의 울음소리가 며칠이나 이어지던 밤, 창밖에서 우당탕탕 난투극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일인가 싶어 얼른 창문을 열어보니 겨울집을 가운데 두고 (힘도 좋지, 둘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벽에 붙여놨던 집이 밀려나와 있었다) 연이와 하늘이가 뱅글뱅글 돌며 쫓기 놀이 같은 걸 하고 있었다.

하늘이가 누군고 하면, 그간 걸핏하면 연이와 연이 집을 노리고 접근했던 칩입자냥이다. 눈동자가 약간 하늘색이 돌아 하늘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연이 사료를 탐내지 못하도록 따로 뒷마당 벽 위에 밥자리를 만들어 매일 저녁 따로 사료를 챙겨주고 있었다. 물론 사료를 따로 챙겨줘도 이 녀석은 연이 집이 탐나는지 2-3일에 한번씩 슬쩍 축대 철망을 넘거나 벽을 타고 접근해 연이가 질색팔색 울어대게 만들었다. 자지러지게 연이가 울면 왜 왜 왜 ! 고함치며 내가 출동해서 잠자리채로 녀석을 쫓아주곤 했었는데;; 헐.. 그 녀석과 짝짓기를 하기에 이른 모양이다!

발정기 동안엔 둘이 싸우던 때의 울음소리가 들린 적이 없고 약간의 하악질 + 그냥 몸싸움만 벌이는 듯 했으므로 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고 물러나드렸다. 대체 길냥이의 발정기 짝짓기는 며칠이나 지속될까 궁금했는데, 연이의 발정기 울음소리는 차차 줄어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또 궁금해졌다. 연이는 과연 임신을 했을까? 작년 5월에 태어났다고 치고 9개월이 지났으니 이미 연이도 성묘라지만 워낙 체구가 작은데; 그래도 단번에 임신을 했을지 어쩔지... 길냥이의 임신 확률은 백퍼센트일까?

열심히 정보를 찾아보니 길냥이들은 전략적으로 여러마리의 수컷과 짝짓기를 해 새끼들의 아비가 누군지 아예 모르게  하고, 실제로 서로 다른 수컷의 새끼를 동시에 임신할 수도 있단다. 연이 주변에 얼씬거린 수컷이라고는 하늘이밖에 못봤는데 과연...

발정기 동안에는 애교도 안부리고, 사료를 줄 때도 가까이 다가와 양양거리기는커녕 멀리 떨어져 지그시 쳐다보기만 했던 연이는 거사 이후 다시 야옹야옹 울며 놀아달라거나 빨랑 사료를 내놓으라고 한다거나 손을 내밀면 붕붕이를 하며 만져보기도 하는 등 안정을 되찾은 것 같다.   

3월 초: 내방 창문을 열면 연이가 이렇게 눈을 맞추고 야옹야옹 인사한다

발정기 이후 좀 달라진 게 있다면 연이가 좀 꼬질꼬질해졌다는 것. ^^; 세수도 언제나 깔끔하게 해서 새하얀 털의 자태를 자랑하더니만 요샌 위 사진처럼 눈꼽이 좀 덜 닦인 얼굴이고, 몸을 바르르 털면 노란 먼지가 풀풀풀. 

그러다가 얼마 전엔 하늘이랑 연이랑 둘이 엄청나게 싸움이 붙어서 온동네가 시끄러울 정도로 연이가 울어댔는데 내가 잠자리채로 협공에 나섰지만 흥분한 연이는 달아나던 하늘이를 멀리까지 뒤쫓아갔고, 담장 너머 어딘가 안보이는 곳에서 하늘이가 연이를 깨물었다(혹은 할킨 걸까?). ㅠ.ㅠ 엉덩이쪽 옆구리에 털이 움푹 파일 정도로 물린(혹은 할킨)자국이 보였는데 피는 나지 않은 것 같고, 튀어 날아오르듯 도망쳐온 연이는 한참 숨을 헐떡이다 물을 마시고는 제집으로 쏙 들어갔다. 하늘이 이 나쁜 자식!

하늘이는 별로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 하늘이 입장에서 보면 헷갈릴 만도 할 것 같다. 하늘의 입장의 가설을 세워보면 아래와 같다.

1) 작년부터 집도 밥도 여유로운 암컷 길냥이 영역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옆에 인간 집사가 자꾸 나타나 훼방을 놓아 목적 달성이 어렵다. 그래도 계속 얼씬거리는 중. 2) 갑자기 발정기 울음으로 이 암컷이 나를 유혹함.  3) 그래 좋다, 짝짓기 성공. 이제 넌 내 애인이다. 4) 이상하다, 짝짓기할 땐 언제고 이 암컷이 다시 나를 멀리한다. 인간도 다시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먹튀냐?! 5) 인간도 이상하다. 밥 챙겨줄 땐 언제고 암컷 냥이 옆에만 가면 잠자리채로 쫓아버리네? 어쩌란 거냐.

하늘이는 몸집도 연이의 1.5배-2배 가까이 되고 뭔가 연륜이 있어보인다. 내가 저리 가라고 버럭 고함을 질러도 멀리 도망치지도 않는다. 어차피 창밖으로 못나가니 담장 너머 철망 너머까지 쫓아갈 수 없다는 걸 아는 듯하다. 그래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빤히 보다가 금세 다시 접근을 시도할 때가 많다. 한 겨울에 창문 열고 헤드렌턴으로 어둠을 비춰가며 녀석과 한참 대치하려면 어찌나 춥던지 원;; 

하여간 하늘이는 오늘 아침에도 연이가 집안에서 쉬고 있는 사이 집밖에서 얼씬거리다가 연이의 구조신호(으으으으.. 낮게 위험신호를 보냄)를 받은 내가 창문 열고 쫓아내야했다. 연이와 하늘이의 영역 다툼은 과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지... 길게 외출을 해야할 때면 혹시라도 연이가 하늘이한테 해코지를 당할까봐 걱정스러워서, 오자마자 무사한지 확인하는데 입때껏^^; 연이는 다행히도 자기 집을 잘 지켜왔다. 고양이의 임신 기간은 2달. 앞으로 진짜로 새끼를 낳을지 어쩔지 모르겠는데, 양양연진 세 마리를 창밖에서 처음 맞닥뜨렸던 경이의 순간이 또 기대되기도 하고, 제발 이번 발정기엔 그냥 잘 넘어갔길(?) 비는 마음도 있다. 앞으로도 포획틀 대여하고 어쩌고 해서 중성화 수술을 시키는 것까지는 시도할 자신이 없으니, 그냥 자연의 섭리에 맡기는 수밖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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