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언니와 K언니, S와 나, 네 사람이 떠난 자동차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LA로, 다시 한국으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 날이 시시각각 다가왔다는 실감에 전날부터 슬슬 아 우울해, 집에 가기 싫다...고 다들 투덜투덜거렸다. 은행 지점장님이신 E언니는 휴가 중에도 내내 간간히 주요 고객의 전화를 받아 응대하고 일처리를 지시했고, 역시나 은행원인 친구 S는 휴가 중에 은행에서 연락이 오진 않았지만, 동부와의 시차 때문인지 무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9시까지 매일 15시간씩 격무에 시달렸고 토요일에도 일하러 나가기 일쑤인 '노동기계'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마감을 못지켜 노트북까지 싸들고 간 나는 그래도 중간에 마무리 원고를 이메일로 쏘아보내주고는 본격 휴가모드를 즐기던 참이었다. 성실한 엄마와 아내 역할로 돌아가 끼니 걱정을 해야하는 K언니까지... 다들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나파 매리엇 호텔은 우리에게 특히나 넉넉하고 푸근한 인상으로 남았다. 왜냐하면 ^^;;

샴푸와 목욕 용품의 질과 향에 민감한 E언니는 큼지막한 샴푸와 샤워바스를 아예 큰 통째로 가방에 싸들고 다녔었는데, 매리엇 호텔 체인도 소모품은 지역마다 호텔마다 거래처가 다 다른지... 전날 혹시나 써보니 호텔에 구비되어 있는 샴푸와 린스, 샤워바스가 더 고급이고 머릿결도, 살결도 더 맨들맨들 좋아진 느낌이었다! 감고 나면 더 머리칼 뻣뻣해지는 다른 호텔 샴푸와 뭔가 달라!(동양인의 직모는 다른 인종의 금발이나 흑모, 적모 등등과 성분이라던가.. DNA 조성이 좀 다르다는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인종들을 위해 개발된 샴푸를 쓰면 당연히 뻣뻣해질 수도 있단다. 정말일까?) 해서 전날 저녁 호텔방에 들어가 프런트에 연락해 샴푸랑 린스 따위 비품을 좀 더 갖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당근 오케이. 

잠시 뒤 미소띤 얼굴로 호텔방 초인종을 누른 프런트 직원은 ㅋㅋㅋㅋ 꽤 큼직한 일회용 플라스틱 병에 든 샴푸와 린스, 샤워바스를 각 10개씩쯤? 투병 비닐봉투에 한보따리 담아가지고 나타났다. 푸하하하... 옛다! 실컷 원없이 쓰거라~! 던져주는 느낌? ㅎㅎㅎㅎ

E언니는 돌연 진상 고객 된 것 같다고 민망해했지만, 뭐 어때! 우린 신나게 아침 저녁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고, 남은 샴푸랑 린스 따위는 친구 S가 모두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아침을 먹으러 내려간 컨시어지 라운지에서도 우린 배불리 조식을 먹고나서 바나나랑 사과, 머핀은 물론 카페처럼 큼지막한 일회용 종이컵과 뚜껑까지 구비되어 있는 커피와 차까지 바리바리 점심끼니를 챙겨가지고 나왔다. 

잘 있어라, 인심 좋은 호텔아.. ㅋㅋ


LA로 돌아가기 직전, 300마일(480킬로미터)을 달려 들른 곳은 야생양귀비 보호구역인 앤틸로프 밸리. 요즘 조경식물로 우리나라에도 많이 심는 화초양귀비가 아니라, 야생 양귀비라는데 으음... 우리가 약간 시기를 잘못 맞춰 거의 다 져가고 있었다. LA로 내려올 때 들를 게 아니라, 열흘 전 샌프란시스코 올라갈 때 들렀더라면 마지막 만개 모습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 (그치만 물론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을 포기할 순 없으니 후회는 없다) 주변 언덕들이 죄다 알록달록한 양귀비 꽃밭이라던데 에이.. 입장료 내고 들어간 곳보다 입구쪽 벌판에 꽃이 더 많았다.

정식 보호구역 들어가기 이전 들판이다. 드론 날리는 구경하느라고 한참 넋놓고 바라봄

이 꼬마 드론 조종 엄청 잘하더라

정작 입장료 내고 들어간 언덕 위는 ㅠ.ㅠ 양귀비가 완전 끝물... 저 건너편 언덕엔 흰색 양귀비가 핀다는데 확인할 길이 없고...

굳이 더 올라가봤자, 언덕을 넘어가봤자 별 볼일 없을 거라며 세 사람은 뒤에 남았으나, 나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면서 등산으로 단련한 튼튼한 두 다리를 뒀다 뭐하겠냐며 꾸역꾸역 혼자 언덕을 넘어갔었다. 결과는 당연히 위와 똑같은 풍경뿐..

S는 옛날에 만개때 왔을 때도 별로 볼 것 없었다고.... 여길 뭐하러 오냐고 E언니 안들을 때 궁시렁궁시렁했지만,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모든 관광일정을 살뜰하게 짠 E언니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 같다. 물론 나는 드론 날리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이렇게 짤뚱하고 바람결 따라 거의 누워 자라는 야생양귀비를 구경해서 좋았다. ^___^

터덜터덜 황량한 오솔길을 홀로 돌아오는 모습을 친구가 찍어주었는데, 사막지형인 LA가 가까워졌음이 실감되는 이 사진 마음에 든다. 에고.. 저 하늘 좀 보라지..











이후론 곧장 차를 달려 LA시내 한인마켓 푸드코트에서 각자 원하는 한식 메뉴로 저녁을 먹었다.

친구가 한국 올 때마다 양 적다고 툴툴거리는 LA짜장면이 궁금했던 나는 짜장면, 친구는 짬뽕을 먹었던가... 감기로 계속 골골했던 K언니는 뜨거운 국물이 나오는 걸로 시켰는데 뭐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E언니는 아마 고기였던듯. 

LA 시내 한복판에 있는 주상복합건물 아파트에 사는 E언니네 주차장에 세웠던 친구의 하늘색 미니로 바꿔타고 드디어 언니들과 헤어져 다시 LA에서 북쪽으로 40분쯤 달려야하는 그라나다힐스에 있는 친구 집에 도착했다. 

친구와 나의 로망이었던 하늘색 미니를 친구는 결국 2년 전 장만해 나를 태워주었다. 이 사진은 사실 다음날 찍은 거지만 ㅎㅎㅎ


묵직한 가방을 집안에 들여놓자마자...

뜬금없이 약을 사다 달라는 친구가 둘이나 카톡을 보내왔으므로, 좀 짜증스런 기분을 참으며 약 쇼핑에 나서야했다. 다음날도 일정이 빡빡해 따로 쇼핑할 시간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ㅎㅎㅎ 

사야할 약은 용량 적은 아스피린(심장병 예방에 좋단다)과 생리통에 잘 듣는다는 진통제, 그리고 영양제. 그러나... 헉... 똑같은 상표에도 뭔 약의 종류가 그렇게나 많은지! 미국엔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양의 종류가 무진장 많은데, 그 중에서 찾아내느라 와이파이도 잘 안잡히는 마트에서  제품마다 사진 찍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확인받고 그러느라 중간에 버럭 화가 났다. 아니 왜 이딴 귀찮은 심부름을 시키고 말이야! +_+ 앞으론 여행갈 때 몰래 가야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ㅋㅋ



후딱 약 쇼핑을 마치고선 다시 또 다른 마트에 들러 다음날 집들이에 가져갈 꽃과 과일, 아침에 토스트 해먹을 빵을 사들고 다시 친구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맥주 한 캔 해야지.. 싶어 마트 맥주 코너를 기웃기웃하는데,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왼쪽 사진에 든 맥주를 추천했다. 맛도 있고 싸다나. ^^;;

ㅎㅎㅎㅎ 딱히 맛있는 건 아닌데, 요즘 한국 마트에서 4캔에 만원하는 프로모션 행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듯 이 맥주로 그렇게 팔리고 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500ml 한 캔이면 취하는 주량인데 뭐가 중요하랴.

친구네 집에서 또 다시 세탁기로 밀린 빨래를 돌리고는 도란도란 친구와 수다를 이어갔다. 주로 친구가 또 언제 한국에 나올 것인가...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노동력을 착취하다못해 기계 취급을 하는 은행은 얼른 때려치워라, 아니면 다른 데로 이직을 해라... 나는 계속 그런 조언을 했다. 

근데 친구는 집에 있는 것보다 은행 나가는 걸 더 편해하는 성격이다. +_+ 집에 있으면 당연히 해야하는 집안일이 너무너무 싫다나. 일요일 온종일 시간 보내기가 지겨우시다고. 맙소사, 일 중독증 환자가 틀림없다.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뒹굴 게으름부르는 것의 묘미와 가치를 찬양하고 설파했고... 그러다 술이 올라 얼른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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