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여행후기를 빨리 마쳐야할텐데... 생각하고 보니 으아.. 오늘 날짜로 쓰는 이날의 후기는 딱 석달 늦은 셈이다. 기억 다 사라지기 전에 어서 마무리를 지어야한다는 압박감이 스멀스멀...

여행가서 나름 기록한답시고 작은 수첩을 가져가서 메모를 하긴 했는데 벌써부터 게을러져서 이때부턴 간단히 동선만 적혀 있고 느낌이나 감상은 거의 없다. 심지어 끼니별로 뭐 먹었는지 안 적어놓은 날도 많다. ㅠ.ㅠ 수다떠느라고 그랬을까? 흠.. 사진을 보며 기억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ㅋ

캐나다에 있는 사흘간은 아쉽게도 계속 날씨가 안좋아 비가 오락가락했다. 햇빛이 찬란했더라면 꽃구경이 더욱 빛을 발했을 것이라고, 사진도 훨씬 더 예뻤을 것이라고 E언니는 계속 아쉬워했지만, 우산 쓰고 돌아다니는 우중산책도 나름 운치 있고 좋았다. 

호텔에서 조식부페를 먹고 (귀찮아서 이 때쯤엔 조식 사진도 안찍기 시작;; ㅎㅎ) 일단 나름 관광지라는 크레이그더랙 '캐슬'(Craigdarrach Castle) 구경에 나섰다. 영어로 적힌 표지판 보면서 대체 발음 어떻게 하는지 몰라 기념품 가게 직원한테 물어봤다. ㅋㅋ

캐나다 정착민의 역사가 얼마 안되다 보니, 초창기에 유럽에서 건너와 돈 많은 사람들이 빅토리아풍으로 (대충?)지은 이런 집 정도에 막 '캐슬'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유적지 취급을 한다.  하긴 뭐 우리나라도 아파트에 ㄹㄷ캐슬이란 이름 붙이는 국민이니 뭐랄 수는 없지만 암튼 막상 가보곤 애개개.. 그랬다. ^^; 설상가상 일요일이라 집안엔 못들어가게 하고 기념품 가게만 열어놨어! ㅋㅋ 

사기다 사기 그러면서 구경했던 유료 브로셔 ^^

한 10분쯤 후딱 돌아보고 나오는 걸로 족했으나, 재미 있었던 건 이 건물이 약간 언덕지고 깔끔한 고급 주택가에  있어서 주차장 입구 찾느라 주변을 한바퀴 괜히 더 돌아야했다. 그러다가 어느 집 마당에서 너구리를 보았다는 것! 몸집이 제법 큰 귀여운 너구리 한 마리가 도망도 안가고 어슬렁 어슬렁 남의 집 꽃밭을 돌아다니다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더니 또 시큰둥 가던 길을 가는 게 아닌가. 방향이 애매해서 사진은 못찍었지만, 이 캐슬을 보고 나와서 우리의 촌평은... '예쁜 꽃밭에서 귀여운 너구리를 봤으니깐 괜히 여기 들렀던 이유로 충분해!'였다. ㅎㅎ

그러고는 다시 빗길을 달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부처트가든'을 찾았다. 역시나 돈많은 (아마도 귀족출신?) 초창기 이민자가 오래오래 공들여 가꾼 정원이라는 것 같다. 유럽식 정원도 있고 일본식 정원도 있고(일본풍 정원은 세계 어딜 가나 다 있는듯)... 암튼 계절별로 꽃들이 지천이어서 언제 가도 보는 맛이 있다고 브로셔에 써 있었다. 우린 튤립이 만발한 시기를 노리고 간 거였는데, 좀 일러서 만개한 튤립보다는 봉오리를 더 많이 보았고 그래서 E언니가 느므느무 아쉬워했다. 만개하면 튤립이 거의 애들 머리통만하다나 뭐라나... 우린 비교대상이 없으니 그저 이 정도도 예쁘다고 좋아라 했을 뿐이다.

부처트 가든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 속하는 빅토리아 섬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란다. 비가 부슬부슬오는데도 사람들이 꽤 있어서 의외였고.. 주차장 구석구석 공원 입구에 아무나 쓰다 놓고 가라고 투명비닐우산이 놓여 있었다. 우린 각자 우산이 있는데도 투명한 우산을 쓰는 게 더 구경하기 좋다고 해서 얼른 두 개 집어들었다.

꽃그림 들어간 입장권도 예뻐서 한번 찍어보았음. 캐나다 달러는 미화보다 환율이 약간 더 낮아서 $30이면 3만원이 채 안된다. 제주도에 새로 생긴 식물원이나 곤지암 화담숲 입장료가 이 절반도 안되는데도 비싸다고 버럭 화낸 적이 있다. 확실히 우리나라 물가가 훨씬 싸고, 문화생활비는 더더욱 저렴하다고 느꼈다. 캐나다는 예쁜 정원 구경하는 비용이 막 놀이공원 자유입장권 가격이다. +_+ 

암튼 표를 내고 들어가면 곳곳에 예쁜 건물들이 있고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꽃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다. 튤립은 아직 덜 자랐거나 봉오리 덜 벌어진 게 많았고, 활짝 핀 건 주로 수선화, 히야신스, 아이리스... 그밖에 수많은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층층이 촘촘이 꽃을 심어놓아서 막 이런 느낌...? 

 

노란건 모르겠고 분홍색은 금낭화 히야신스 자주색이 정말 예뻤던 튤립과 히야신스

확실히 비를 맞아서 꽃들이 더 촉촉한 느낌으로 말갛게 사진에 담긴 것 같다.

개인적으로 뜻밖에 신기한 경험은 '성큰?선큰?가든'(Sunken Garden)이었다. 으음... 여기서 또 나의 운명론이 등장하고 마는데... ㅋㅋ 노트북까지 싸들고 가서 번역하던 소설에 스토리상 매우 중요한 장치로 'Sunken Garden'이 등장했다. 나름 구글로 검색해보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았어도 모호하고 막연한 느낌이라 일단 '침상정원'으로 번역하고는 구차하게 역주를 달았었다. 언덕 지형을 활용하여 지표면보다 낮게 어쩌구 저쩌구... 그러고도 딱히 이거다 싶은 느낌이 없었는데,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이 만들려는 '선큰 가든' 개념이 뜻밖에 내 눈앞에 뙇~~~!! ㅋㅋ 역시 마감 미뤄두고 놀러간 명분이 바로 이거였어! 라고 막 홀로 끼워맞추기 한판을 하고는 내친 김에 친구에게 또 어거지 운명론을 하나 더 고백했다.  '남자주인공이랑 너랑 생일이 똑같이 만우절이야! 우연의 일치 치고는 뭔가 되게 이상하지 않냐? 아무래도 이 책 영화 개봉되면 대박날 것 같아...' (그러나 몇달 뒤 현실은 내 예상과 빗나간다 ㅋ)

이것이 Sunken Garden

나무로 만든 쓰레기통에도 예쁘게 꽃을 얹어놓은 정원을 구석구석 몇시간이나 돌아다니다가 다리가 아파서 카페에 들어가 좀 노닥거린 뒤 앙증맞고 예쁜 쓰레기(!)들이 지천으로 깔린 기념품 가게에서 한참 이것저것 집어들고 고민하다 계속 염원하던 '플리스 후드티'를 일단 구입해 뿌듯했다. (캐나다라고 적힌 검정색 삼선 지퍼후드를 저렴하게 사서 좋아라했는데 ㅋㅋ 나중에 친구집에서 빨아보니 100% 폴리에스터라 보풀이 장난 아니게 일었다. ㅠ.ㅠ)

카페와 기념품 가게 카운터에도, 테이블에도 도무지 생화 같아보이지 않는 꽃화분과 화병이 놓여 있었는데.. 설마 조화겠거니 만져보면 다 생화였다! 조화파는 가게에서 종종 너무 과장됐다고, 색깔이며 모양이 좀 웃기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꽃들이 진짜로 다 실화였음을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ㅎㅎㅎ

맨 오른쪽 사진은 대표로 방명록에 한마디 쓰라고 언니들이 시켜서 비와서 아쉽지만 그래도 좋았다고 적는 중이다. 여행기라고 막 인물사진 대방출 ㅠ.ㅠ 등산복 입고 관광하는 한국인들 유럽에선 흉본다지만 흥! 캐나다엔 나처럼 우산 안쓰고 바람막이에 달린 모자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엄청 많이 봤고, 어쨌거나 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죄다 얇은 옷과 반팔만 가져가서 저 겨울용 바람막이가 얼마나 요긴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날 점심은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부처트 가든 카페에서 머핀으로 때운 듯. 그러나 차에서 계속 간식을 먹었기 때문에(무려 구운 쥐포와 문어다리가 지퍼백 가득 들어있었고, +_+ 주유소 들를 때마다 젤리며 과자를 꼭 사가지고 차에 올랐다 ㅎㅎ) 열흘 내내 배가 고팠던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출출해질 새도 없이 노상 뭘 입에 집어넣고 있었음.

부처트 가든을 나와 차로 또 한참을 이동하다, 캐나다 과일도 좀 맛을 보자며 유기농 마켓에 들렀다. 과일값은 그래도 한국이랑 비슷하군.. 했던 것 같다. 홍옥처럼 반질반질 윤기나는 작은 사과랑 방울토마토랑 블루베리를 샀던가... ㅠ.ㅠ 암튼 호텔이 있는 항구쪽으로 이동하자 점점 날이 개었다. 그렇다면 또 부두 구경을 좀 해볼까나...

관광객인지 주변에 사는 주민인지 우리처럼 부두를 괜히 어슬렁거리는 가족과 어린이를 만나 슬며시 도촬. ^^; 부두에 정박해있는 배들은 하나같이 새로 칠한 듯 깨끗했고, 고기잡이배가 분명한 파란색 어선들도 어찌나 깔끔한지 약간 놀랐다. 비린내도 안나고, 부두와 선창 주변 물도 바로 뛰어들어도 될만큼 맑았다. 

아직 배는 안꺼졌지만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 내비에 주소를 찍고 찾아갔는데도 도무지 음식점이 눈에 띄질 않아 일단 길에 주차부터 하고 (일요일이라 무료!) 이쪽 저쪽 건물마다 기웃거리고 다녀야했다. 분명 주소로는 근처인데... 그러면서. 

 

별점 후기를 참고로 선택한 음식점을 찾아 헤매느라 뜻밖에 골목골목 들어가본 것도 괜히 재미나고 신났다. 저녁을 먹기에 너무 이른 시간인지 인적 드문 이런 골목으로 쭉 들어가보면 안쪽 모퉁이에 예쁜 음식점들이 콕콕 박혀있고, 이른 저녁을 먹는 손님들도 꽤 있었다. 그저 인구가 적어서 대체로 한가로운 분위기인가?

 

암튼 구글맵을 켜고 거의 부두 바로 앞까지 한참 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에라이, 포기하고는 차로 돌아가 다시 내비를 찍어보자 그랬는데 ㅋㅋ 주차해놓은 도로 바로 위쪽에 음식점이 있었다. 간판이 작아서 못보고 지나친 뒤 계속 아래쪽 거리만 뒤졌으니 나올 리가 있나...

여행을 가서는 길을 좀 잃고 헤매는 것도 다 추억거리라며, 그래서 배 좀 더 꺼졌으니 저녁밥 많이 먹자! 언니들이 하하 웃으며 우릴 위로했는데, 아이고 위로하실 필요 없어요... 전 그냥 막 돌아다니는 게 좋다니깐요.

샐러드는 요리로 칠 수 없다면서 우리가 메뉴판을 차마 안 내려놓고 뭘 하나 더 시킬까 고민하고 있었더니 웨이터가 음식 갯수 니네 넷이 먹기 충분하다고, 막 말렸다. ^^; 감자튀김 그릇을 보고서야 우리도 그 마음을 이해했다. 맥주랑 같이 신나게 먹었으나.. 저 바삭한 감자튀김을 결국 다 못먹고 남기고 왔다. 테이블은 엄청 좁고 그릇은 어찌나 큰지... ㅎㅎ

봉골레 파스타와 해산물 리조토, 프라이드 치킨을 시켰던 것 같다. 근데 또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양이 많지 않아 보이는데? ㅋ 하지만 밥이 산처럼 쌓였던 리조토는 우리나라 음식점 양의 거의 세배쯤? 느끼함에 강한 나는 대체로 냠냠 맛있게 먹었는데 봉골레 파스타에 치즈를 많이 넣어서 느끼하다며 친구는 김치먹고 싶다고 막 괴로워했다. S는 은행에서 퇴근해 집에 들어갔는데 밥 하기 귀찮으면 김치만 한 그릇 퍼먹고 잘 때도 있다는 기인이다. *_*

암튼 우린 부른 배를 두들기며, 저녁식사 후엔 미리 웨이터에게 물어본 '캔디 가게'를 찾아갔다. 단풍국엘 왔으니 메이플시럽은 사가야하지 않겠냐는 것. 헤맬 것도 없이 메인스트리트 정 가운데 떡하니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메이플시럽과 단풍잎 모양 과자 따위를 샀다. 

날이 흐려서 벌써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E언니와 S자매는 치안 위험한 캘리포니아 주민들이라 미쿡이든 캐나다든 밤중에 돌아다니면 큰일나는 줄 아는 분위기여서 어두워진 뒤론 거의 호텔에서 꼼짝도 안했다. 이날 처음으로 가로등 켜진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제 겨우 나같은 올빼미의 시간이 시작되는 거라고 아쉬워했다. ^^;  그러나 일요일 저녁 캐나다 거리엔 간간이 술집과 마트 빼곤 가게가 다 문을 닫았다! ㅎㅎ

동그랗게 다듬은 가로수를 보라! 다스베이더의 투구 같기도 하고.. 단발머리를 형상화한 건가 싶기도 하고... 도로쪽은 큰차에 닿지 않게 하려는 건지 일부러 더 파놓았다. 여기가 메인 스트리트인데 길도 별로 안 넓고 이렇게나 한산하다. ^^; 횡단보도 건너면서 후다닥 찍은 사진이다.

캐나다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니, 낮에 캐나다 유기농 마켓에서 선 과일을 안주 삼아 맥주라도 한잔 하자고 다시 호텔 근처 마켓에 들렀지만 ㅎㅎㅎ 결국 마시는 요구르트, 우유, S가 자긴 아침으로 꼭 먹어야겠다면서 고른사발면만 사가지고 나왔다. 배불러서 뱃속에 맥주를 더 우겨넣을 여유도 없을 것 같고... 요즘 또 나는 맥주 한두잔에 후딱 취해버리고... 아쉽지만 그렇게 캐나다 과일을 술 없이 먹으며 빅토리아 섬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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