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에 출발하는 장거리 밤 비행기를 타본 건 아마 난생 처음인 것 같다. LA는 워낙 승객이 많은지 대한항공, 아시아나 모두 하루에 2번씩이나 스케줄이 있더라. 도착하면 오후 3시쯤이니 악착같이 뱅기에서 안자고 버틴 다음 도착해서 저녁먹고 시체처럼 자고 일어나 시차적응 하루만에 완료! 뭐 이런 생각을 품었었다. 혹은 비행기 타자마다 밥과 술을 잔뜩 먹고 식곤증과 술기운으로 내내 자고 가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ㅠ.ㅠ 그건 소싯적에 내가 자고 싶을때 암때나 머리만 대면 잠드는 천하무적의 여행자 성향을 발휘할 수 있었을 때나 해당된다는 걸 요번에 또 깨달았다.
암튼...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냉장고와 냉동실에 각종 국과 카레, 찌개, 밑반찬을 잔뜩 만들어 채워놓고, 냉장고 문앞에 내용물 목록과 함께 엄마가 지켜야할 사항들을 줄줄이 적어놓았다. +_+ 왕비마마는 밥 차려먹기 귀찮으면으면 나가서 아무거나 사먹을 테닷! 이런 협박을 계속 시전하셨으나 결과적으로 보름간 죽집 한번, 백화점 식당가 한번(둘 다 홀로 대학병원 진료 가신 날 점심 끼니였으므로 잘했다고 칭찬해드렸음 ㅋㅋ)뿐, 착실하게 집밥으로 냉장고를 차근차근 비워나갔다고 한다. ㅎㅎ
연로한 엄마를 홀로 두고 여행 떠나는 무거운 마음+뻘쭘한 작별의 시간에 대한 걱정은 왕비마마가 쿨하게 월요일 오후 요가수업 때문에 나보다 먼저 집을 나서며, 엄마 잘 있을테니 걱정말고 잘 다녀와라! 그러시는 바람에 한쾌에 해결되었다. ㅎㅎ 심지어 가서 친구랑 밥 한번 사먹으라고 용돈 봉투도 쥐어주심. ㅠ.ㅠ
집 근처 호텔 앞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 미리 셀프체크인도, 좌석배정도 다 해놓았던 터라 짐만 부치면 되는 상황. 요샌 공항에서 셀프 체크인이 추세인지, 단체 여행객들도 다 그쪽으로 몰려 생각보다 엄청 빨리 수속이 끝난 건 아닌 느낌. 아 뭐 그러나 이제야 나는 가노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공항 라운지에서 활주로에 죽 서 있는 비행기들을 보면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이륙과 착륙에 대한 막연한 공포, 좁은 좌석에 장시간 구겨져 있어야하는 괴로움을 예감하면서도 이쯤부턴 온세상이 막 아름답다. ㅋㅋ
오전에 비가 내려서 우산을 챙겨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었는데 다행히 오후부터 개어서 기뻤고, 인천에 도착했을 때쯤엔 파란 하늘도 보였다. 저 정도도 '파란 하늘'이라고 부르게 된 우리나라 미세먼지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역시 비교해보니 알겠더라.
30분쯤 지연되기는 했지만,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하고... LA까지는 11시간. 미련하게 노트북과 일감을 꾸역꾸역 싸들고 나선 길이었지만 좁아터진 비행기 좌석에서 펼쳐놓고 일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런 상황도 되지 않았다. 좌석 배정을 너무 늦게 받아서 창가석 3자리중 가운데 낑겨 앉았기 때문이다. ㅠ.ㅠ 아오.. 담에 또 여행가게되면 티케팅 하자마자 좌석배정부터 받으리! A380 기종은 처음 타보는 것 같은데.. (아닌가 터키 갈 때도 탔었나.. 가물가물;;) 암튼 생각보다 그리 좌석이 넓어진 느낌은 아니다. 다만 1인용 스크린이라서 VOD를 골라보는 재미가 있는 건 맞지만... 기종은 상관없고 역시나 좌석 널널한 비행기 3좌석쯤 전세낸 듯 누워가는 게 젤 편하다.
째뜬 밥 두번 먹고, 영화 3편 보니깐 벌써 도착안내가 나왔다. 마지막 영화가 <덕혜>였는데 ㅋㅋ 기장이 도착안내 방송을 하고 어쩌고... 또 다시 착륙 준비 방송을 할 때까지 틈틈이 겨우겨우 끝까지 봤네그려.
오후 3시반. 드디어 LA공항에 도착해 카톡으로 친구에게 무사 도착을 알렸다. 자기네는 아직 공항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미안하는 답이 왔었는데.. 아오.. 결국 엄청 미안해진 건 나였다. 무슨놈의 입국심사가 2시간이나 걸리는지!!!! 거기도 셀프 입국신고하는 기계가 있길래 열심히 (한국어도 지원됨) 눌러서 신고서도 프린트 해가지고 기다렸으나, 뭐 미쿡사람들 일하는 속도가 원래 그러듯... 느릿느릿... 한 사람 입국심사 끝나도 심사관이 손들어서 오라고 하기 전엔 접근하면 안되는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도 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드디어 5시반... 기진맥진 친구 일행과 상봉, 저녁을 먹으러 갔다. 뱅기에서 니글니글한 음식만 먹었을 테니 냉면 어떻겠느냐고... 완전 좋지요.
공항에서 음식점으로 향하는 길...
아니 이것은! 바로 라라랜드 도입부에 나왔던 그 고속도로 아닌감요?? 역시 내 눈썰미는 죽지 않았어! 거기 맞단다. @.@
게다가 마침 퇴근길 정체도 시작되어 길도 딱 영화처럼 막혀서 느릿느릿... 뒷좌석에서 이리저리 암만 사진을 찍어봐도 물론 영화처럼 근사한 샷은 나오지 않았다. ㅠ.ㅠ 멋진 빈티지 자동차 지나갈 때 찍고 싶었으나 상황이 안 도와줌.
아무튼 차에서 내려서 다들 춤춰야할 것 같아요.. 라고 내가 킥킥거리자 친구 언니가 곧바로 자기 폰에 든 <라라랜드> ost를 틀어주었다. 라라랜드에 온 걸 환영해~ 라면서. ^^;
한인타운으로 밥 먹으러 가면서 내다본 LA 하늘은 그야말로 쾌청. 미세먼지는 1도 없다는 듯 맑은 공기... 날씨도 별로 덥지도 않고 서늘했다. 그간 우리가 얼마나 미세먼지에 쩔어 살고 있었더냐.. 어휴.
<조선갈비>라는 델 가서 배도 안 고픈데 세숫대야만한 그릇에 나온 물냉면과 갈비로 엄청 포식하곤, 일단 친구집으로 향했다. 담날 일찍 출발해야하니 무조건 쉬기로...
언니의 시내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친구의 '미니'를 드디어 시승할 시간! 몇년전 친구와 나는 동시에 미니 장만을 로망으로 삼았었다. 나는 인세 계약한 책 6만부 팔리면 살 수 있어! 라고 꿈꾸었으나 뭐 당연히 현실의 벽에 부딪쳐 올해로 내게 온지 17년째인 차를 그냥 계속 타는 걸로 ㅠ.ㅠ 마음을 접었고, 은행 관리자로 승진한 친구는 2년전 하늘색 미니를 구입했다.
친구는 작년부터 나랑 통화할 때마다 그랬다. 야! 너 미니 똥차 되기 전에 얼른 와야돼! 집이 있는 그라나다힐스에서 LA까지 하루 왕복 100마일(160km)을 출퇴근하고 있어서 금방 10만마일 채울 거라고.. 그럼 팔아야한다나. ㅋㅋㅋ'
한국에서도 제주도 같은 데 가서 렌트해 타면 되겠지만.. 뭐 암튼 영화 <라라랜드>와 함께 미니를 타보고 내가 운전도 해보겠다는 로망은 이번 여행을 욕심낸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의미에서 특별히 시승샷도 공개. ^^;
(민망함 방지를 위하여 사진은 클릭해도 안 커집니다. 그리고 사실 이 사진은 도착한 날 찍은 게 아니고... 한참 뒤에 뚜껑 열고 잠시 달려보기에 좋은 날 맘먹고 기록으로 남긴 것.)
한국에도 워낙 미니가 많이 돌아다녀서 온갖 색깔의 귀여운 차를 봤지만 내부를 자세히 본 건 처음인데 ㅋㅋ 타자마자 맨 먼저 운전대만큼이나 커다란 속도계가 앞좌석 중앙에 뙇~ 보인다. 신기방기!
째뜬 LA 시내에선 창피해서 못한다며 말리던 친구가 지네 동네 거의 다 도착해서는 입국 축하의 의미로 잠깐 뚜껑을 열어주었었다. 근데 으아, 천천히 달려도 생각보다 바람이 엄청 휘몰아쳐서 머리칼이 미친X 꽃다발처럼 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영화에서 여배우들이 스카프로 머리를 감싸는 이유가 다 있었던 거다. 안 그럼 트레일러에 싣고 아주 느릿느릿 가면서 찍었거나! ㅋㅋ 암튼 조금만 차가 빨라져도 바람에 얼굴 살이 옆으로 밀리는 느낌? 새빨간 스포츠카 같은 거 뚜껑열고 미친 듯이 달리는 건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ㅠ.ㅠ
암튼 친구 집에 도착해서 우린 열심히 짐을 줄였다. 미니는 당연히 장거리용이 아니므로 큰언니 세단에 네 여자의 열흘치 짐을 모두 싣고 다녀야하는데, 뒷트렁크에 다 들어가게 가방을 줄이는 것이 관건! 꾸역꾸역 친구 가방으로 단촐한 옷가지를 모두 옮기고는 곧바로 비몽사몽... 밤 10시를 넘기기도 어렵게 쓰러져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