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놀잇감 2016. 3. 1. 17:06

내리기 전에 빨랑 보러가야지, 아카데미라도 타고나면 괜한 대세거부증이 돋을까봐 게으름뱅이치고는 꽤나 서둘러서 영화를 보러갔다. (근데 결과적으로 오스카는 하나도 받질 못했다! 으이..) 일부러 사전 정보를 하나도 안 찾아보고 갔기 때문에, 배경이 현대가 아니란 것도 몰랐네그려. (스포일러 있음)

 


한줄 평을 쓴다면...
먹먹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영화였다. 

벨로가 후기에 적기를.. 영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처음부터 보고싶은 영화라고 했던가. 그 마음이 뭔지 나도 알겠다. 눈빛 하나, 클로즈업된 표정 하나까지 장면장면 뭔가 자세히 보고싶은데 감정선을 따라가느라 그럴 여력이 없었다. 

클래식한 올드모빌이 돌아다니는 1950년대 뉴욕 거리, 담배연기마저도 향기로울 것 같은 우아함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캐롤, 자존감도 낮고 우유부단의 극치로만 보였으나 캐롤과 만나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걸 확실히 깨닫는 듯한 풋풋한 테레즈.

캐롤(케이트 블란쳇)이 입고 나오는 코트들(모피 코트와 빨간색 숄칼라 롱코트)이야 워낙 인상적이었지만, 그 밖엔 어떤 어떤 옷을 입고 나왔는지 잘 기억도 나질 않는다. 테레즈(루니 마라)의 체크무늬 빵모자가 처음엔 촌스러웠는데 나중엔 예뻐보였다는 정도?

후기를 좀 잘 써보고 싶다는 욕심에 오히려 시간만 질질 끌다가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말았다. 이젠 어느 장면에서 울컥했었는지도 잘 떠오르질 않으니... ㅠ.ㅠ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고 포스터 문구로도 적혀 있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맨 처음 테레즈가 백화점에서 캐롤을 봤을 때, 주변 배경이 흐릿하게 지워지면서 캐롤의 모습만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보면서, 아 맞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찍이 군중 속에서도 한눈에 확 파고들듯 찾아내는 순간이 이런 거였지, 그러면서 덩달아 따라서 설렜던 것 같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매혹된다는 게 어떤 건지, 테레즈한테 마구 감정이입이 된 시선으로 케이트 블란쳇(캐롤)을 바라봤던건 내가 좋아하는 배우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케이트 블란쳇이 캐롤이란 인물을 그만큼 잘 살려낸 게 아닐까. 목소리와 말투도 섹시하기 그지없었는데 나중에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보니 케이트 블란쳇한테 사투리(?) 가르친 사람들도 나오더군. 뉴요커나 동부 특유의 말투를 배웠던 걸까. 언어학자에게 물어보고 싶었음.  

찌질한 남자들이 등장해서 짜증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래도 추하게 망가져가기 직전에 마무리짓는 이야기여서 좋았고 그 성숙한 결정의 주체가 캐롤이어서 더 좋았다. 덩치 큰 캐롤 남편이 사랑을 빌미로 매달리며 취해서 큰소리 칠 때 혹시 폭력이라도 쓰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오히려 캐롤한테 뿌리침 당해서 혼자 넘어지는 거 보고 통쾌했고 안심했다. 아... 참 이건 한국 막장 드라마가 아니지.

대상에 대한 사랑이 담겨야 멋진 사진이 나온다고들 하는데, 테레즈가 찍은 캐롤의 사진들이 정말 멋져서 나까지 흐뭇했고, 비록 뉴욕타임스에 들어가서도 회의하는 남자들 옆에 메모지 들고 서 있는 직책이라고 하더라도 테레즈가 자기 꿈을 계속 좇는 것도 좋았다. 군더더기 없이 딱 둘의 재회 장면으로 끝낸 구성도 마음에 들었고.

워낙 섬세한 영화라 자막번역을 누가 했는지도 궁금했는데(아마도 <캐롤> 책 번역자가 역자후기에서 '남사스러운'이라는 표현을 써서 물의를 빚었단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싫어하는 이모, 홍모 씨와 달리 괜히 튀지 않고 분위기를 잘 잡아낸 것 같아 이름을 눈여겨봤더니 황석희라고. 영화를 하도 안 보러 다녀서 나로선 처음 보는 이름인 거 같은데, 으음 출판 번역계에서 날리는 김석희 선생이 떠오르면서 '석희'라는 이름이 번역을 잘하는 운명인가 택도 없는 일반화 가설에 잠시 빠졌었다. ^^; 그러고보니 '손석희' 앵커도 있네. 남자이름으로 석희는 글과 말로 먹고 사는 이름일까? 표본 겨우 셋 가지고 참 놔;; 

나중에 원작소설을 읽고 나면 어떤 차이가 있을지 비교하는 재미를 또 누려볼 참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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