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는 몇년 전 만난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조만간 대규모 회고전이 있을 거란 예고를 듣고 기다렸던 전시다.

근대와 일제 강점기, 그리고 분단의 현실까지 근현대사를 개인의 역사로 지닌 인물이란 것도, 조선의 서양화가로서 다양한 시도를 한 것도 흥미로웠다. 근대화가 전시에서 이쾌대란 인물을 처음 알게 됐을 때, 부인 유갑봉 여사와의 애틋하고 달달한 '연애담'도 그림 못지않게 인상깊었음을 고백한다. 옛날 사람들이 워낙 성숙하기도 했고 시절이 하수상하여 나이가 꽤 들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지만 휘문고보 졸업반때(그래봤자 19, 20살이다!) 주고받은 연애편지들은 으어... 엄청 진지하고 성숙하다. 실제로 두 사람 졸업반때 결혼을 했다는 것 같다. ㅎㅎ

연애담도 워낙 유명하지만 결혼 이후에도 얼마나 금슬이 좋았는지, 웬만한 그림 속 여자들은 죄다 모델이 아내인 유갑봉인데 애정을 듬뿍 담아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느낌이 척 보기만 해도 전달된다. 대상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예쁘게 정감 있게 담아낼 수가 있을라고...

여러 편지와 개인소장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글씨는 또 어찌나 정갈한 명필인지! "맺힌 구석이 한 군데도 없이, 평생 평온한 인생을 누린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글씨체" 같다는 것이 같이 전시 관람한 친구의 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핏 도슨트의 설명을 듣자니 그냥 '만석꾼'도 아니고 '삼만석꾼'의 아들이었단다. +_+ (정갈하고 깔끔했던 글씨체는 역시나... 포로수용소 시절엔 좀 흐트러진다. 북한 시절엔 어떠했을지 몹시 궁금..)

일제 강점기에 일본유학을 할 정도면 당시에 잘 먹고 잘 산 부유층이리라 짐작 가능하지만 대충 잘 사는 정도가 아니었던 듯. 유학시절 아내도 줄곧 일본서 함께 지냈단다.

째뜬 이쾌대가 월북화가임에도 그 수많은 작품들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던 건,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이쾌대가 아내 유갑봉에게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라고 부탁했으나, 아내가 그림을 한 개도 팔지 않고 대신 시집 올 때 받은(해온?) 패물들을 팔아 먹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쾌대가 생전에 쓰던 고풍스러운 책상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옆에 놓여있던 예쁜 지함이 바로 패물함이었대고, '물목'이었던가.. 여러가지 품목이 적혀 있던 화선지가 함에 들었던 패물 목록이었단다. 대단하다 싶기도 하면서, 또 워낙 어려운 시절인데도 나름 풍족하게 살았을 이들에 대한 괜한 반감까지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한국전쟁 이후 부산 피난살이 하면서.... 유갑봉보다는 한 살 많고, 이쾌대와 동갑인 1913년생 우리 할머니는 생선광주리를 이고 다니셨다던데;; 울 할머니도 이북과 만주에선 몸종 거느리고 사신 아씨마님이었다규~ ㅋㅋ )

하여간에 조선사람, 한국사람을 서양 미술기법인 '유화'로 그려낸 그림들은 대부분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서양의 명화들을 따라 그리려한 느낌이 드는 대작들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나는 주로 '예쁜 여자들' 감상하는 재미에 푹빠져 다녔지만. ^^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