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우, 옳다고 믿는 것과 실제 행동 사이엔 늘 괴리가 존재한다.
그래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기면서도
뭔가 소신을 행동에 옮기긴 어려운 이기주의자로 살아가는 나날이 이어진다.

가령, FTA협상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도 정작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열심히 주시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가장 덜 타락한 인물이라 여겨 지지했던 대통령이 실망스러운 일들을 차례로
저지르는 걸 보며 어느샌가 덩달아 욕을 해대면서도,
이번엔 보수세력의 'FTA 음모론'을 믿고 싶었다. "최대한 협조하는 척하다가 최종 협상 테이블에서 대통령이 판을 뒤엎을 것"이라는... ㅋㅋ
그러나 그런 급진적인 시나리오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 역시 큰형님을 깍듯하게 대접하고 모시는 이 나라 정치인이었으니까.

그가 탄핵을 당했을 땐 추위를 무릅쓰고 광화문 네거리로 달려가 촛불시위를 벌였는데
똑같은 장소에서 FTA 관련 촛불시위가 벌어질 땐 단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몇년 새 그만큼 세상일에 대한 열정이 식고 늙어버려 귀찮음이 앞선다는 핑계를 대는 건
누워서 침뱉는 격일 게다.

이번 FTA 협상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의 농가 피해액이 점쳐지고 있고
무역수지에 대한 우려가 연일 흘러나온다.
덩달아 한숨을 쉬면서도, 막상 우리 집 냉장고를 열어보면 민망하다.

새콤달콤한 과일을 몹시 좋아하는 나는 그간 오렌지와 체리 같은 수입 과일을 많이도 먹어치웠다.
턱없이 비싸다 여기면서도 어김없이 사다 먹으며 나도 모르게 투덜거렸었다.
"아쒸... 미국에선 3불만 주면 오렌지 한 광주리쯤 사다 먹을 수도 있고
체리도 10불어치 사면 엄청난 양인데!"라면서.

귤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귤나무를 불태우며 울부짖던 모습을 본 뒤론, 그간 수입과일에 맛을 들여 더 싸게 많이 먹고파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아직은 유예기간도 있고, 국회 비준도 남아 있고(물론 알아서 기는 놈들이 결국 해치우겠지;;)
우리나라 농촌에 본격적으로 타격이 시작되는 시기는 좀 더 있어야 한다지만,
정책으론 반대한다고 욕을 해대면서 현실의 입맛으론 이기적이었던 알량한 나의 태도라니...
역시 양심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던 게 아닐까.

인간이란 모름지기
농약과 방부제로 범벅된 수입농산물보다는
최대 30킬로미터 이내 반경에서 생산된 제 지역의 청정농산물을 먹어야
유통문제의 구조적인 비리도 척결되고 지구를 오래 살릴 수 있다는데,
현실은 자꾸만 거꾸로 흘러간다.
어디서나 횡포를 부리는 강대제국의 오만이 밉고, 그 논리에 편승하는 정치인들이 꼴보기 싫다.

어차피 요새 귤은 제철이 아니지만
작년 같으면 사흘이 멀다하고 냉장고를 채웠을 오렌지 대신 엄마한테 다른 과일을 먹자고 이야기 하는 것으로 그나마 부끄러운 면피를 시도하는 중이다.
오렌지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엄마는 비슷하게 생긴 금귤(내게는 여전히 낑깡인;;)을 사다주셨다.
오렌지를 먹으려면 허옇게 말라붙은 농약과 방부제를 닦아내느라 한참 씻어내고도 찜찜한데, 우리나라산이라며 농협에서 사온 금귤은 그래도 물에 몇번 헹궈내니 싱그럽고 말갛다.  

오렌지와 체리를 좀 비싸게 사먹으며 계속 투덜거려도 좋으니
귤과 금귤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 과수원을 뒤로 하고 길거리에서 온몸으로 투쟁하는 일은 부디 없으면 좋겠는데... 이젠 너무 늦은 바람인 것 같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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