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집안일로 한숨도 못자고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지만 오래전부터 해놓은 약속이라 젖은 솜 같은 묵직한 팔다리를 움직여 일찌감치 아침부터 부암동으로 나갔다. 부암동 주민께 직접 설명 듣는 석파정 답사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알려진 석파정은 몇년 전 자하문 터널 바로 앞에 서울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미술관 입장료를 내면 덤으로 후원 구경이 가능하다. 개관전 때부터 눈여겨 보았지만 노상 버스 타고 오가는 길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구경하게 되진 않았는데, 아는 분 따라가면 입장료 안내고 석파정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얘길 들은 뒤부턴 더 내 돈 주고 구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계절 좋을 때 제발 한 번 데려가주세요... 그러면서 비벼대고만 있었던 것.
재작년 가을 부암동 답사 땐 시간이 부족했던가 미리 이야기를 해놓지 않아서 석파정만 쏙 빼놓고 구경을 다녔었는데 요번엔 석파정이 '메인'이었고, 구한말 최초의 요정 가운데 하나였다는 '오진암'을 옮겨다 놓은 예쁜 한옥집'무계원'과 '윤웅렬 대감 별서'는 다시보기 같은 부록이었다. 그래서 사진도 석파정이 대부분...
뜬금없는 화장품 면세점 때문에 중국인 관광객으로 득시글거리는 서울미술관 입구를 피해서 우리는 <삼계동>이라는 현판이 달린 옆문으로 입장을 했는데, 그런 어마어마한 특혜는 석파정 후원을 공유하다시피 바로 윗집에서 살고 계신 이날의 주인공 덕분이었다. 부암동과 윤동주 문학관 해설도 하고 계신 C선생님의 모습은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다. TV에 부암동 해설하시는 장면도 방송된 나름 유명인사시라 슬며시 이런 데 공개해도 되지 않을가 싶은데... 고민되면 나중에 삭제할지도. ㅋ
미술관쪽에서 후원으로 나가는 동선은 모르겠고...
솟을대문으로 들어가 언덕을 오르면 제일 먼저 보이는 한옥집. 아마도 사랑채?
우왕 한옥집 예쁘다 감탄하며 옆마당으로 돌아서면 엄청나게 오래된 소나무가 보이고 그 뒤쪽으로 '삼계동'이라는 원래 명칭이 새겨진 바위도 구경할 수 있다. 원래 조선말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이라는 사람의 별장이었고 이름도 '삼계동정사'였다는데, 흥선대원군이 탐을 내 팔라고 압력을 가해도 끄덕하지 않자 그럼 며칠 빌리자 그랬단다. 그러고는 냉큼 고종을 데려다가 재운 것. 당시 왕이 머문 집엔 감히 신하가 살 수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빼앗기는 수밖에... 흥선대원군이 치사한 수법을 써서라도 빼앗을 만큼 진짜 경관 수려하고 아름답고 예쁜 곳이었다. ^^
'석파정'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흥선대원군의 아호인 '석파'를 붙여 생겨난 이름이라나 뭐라나...
굳게 닫혀 있는 만월문으로 올라가는 제일 안쪽 별채에 고종이 머물렀다는 얘기에 슬쩍 접근해서 한장 찍어왔다. 저런 집에서 자면 어떤 기분이 들까나.. +_+
인왕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있어서 정자가 3개나 있었다는데 두 군데는 터만 남았고, 동판을 얹고 색다른 문양으로 기둥을 세운 '청나라풍' 양식의 정자만 볼 수 있었다.
정자로 이어지는 돌다리도 독특하게 굽어 있는 걸 보시라~! 주인장처럼 돌다리에 서계신 분이 이날 우리에게 여러가지 특혜를 제공해주신 C선생님. 기둥 장식이 예뻐서 따로 찍어왔는데 죄다 흔들려주시고... ㅋ 정자 아래 기단석도 아치로 되어있는 게 멋져서 뒤로 돌아가 또 한장 찍었는데 줌으로 당겼더니 역시나 흐릿...
후원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서 계곡과 언덕을 구경하다 돌아보면 지붕을 맞댄 잘 생긴 석파정 한옥들이 뙇~
(나무에 가려진 게 아쉽지만 뭐;;)
서울미술관 건물 옥상엔 이렇게 정원을 꾸며놓았다. 잔디보호를 위해 이날은 들어가지 못하게 해 아쉬웠지만 옥상정원 너머로 보이는 백악도 아름답고 뜨거운 햇살 아래 예쁘게 가꿔놓은 꽃과 잔디와 나무들이 멋졌다. 재벌들이 대부분 미술관을 운영하는 이유는 문화사업입네 하면서 고가의 미술품으로 쉽게 재산은닉과 탈세를 저지르기 위함이라지만, 그래도.... 국가가 제대로 관리할 능력 안되는 문화재 사들여서 관리하고 보존하고 일반인들과도 공유하고 (비록 입장료를 받긴 하지만;;) 그러는데 관심을 갖는 재벌이라면 다행이다 싶었다.
다음번에 서울미술관에서 괜찮은 전시한다는 소식 들리면 입장료 아까워하지 말고 꼭 구경하러 가서 덤으로 후원 관람도 다시 해야지... 이왕이면 단풍 물든 가을에 다시 가보고 싶다.
이날 실은 다른 곳을 먼저 들렀었는데, '메인'이 아닌 관계로 살짝 덧붙이자면...
현진건의 집터라는 곳도 갔었고, 안평대군의 별장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잡초 무성한 공터 구경도 했고,
결정적으로 조선말 개화기의 한옥 변천사에 아주 중요하다는 '윤웅렬 대감 별서'도 다시 구경했다.
개인이 복원해 현재 실제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가볼 수 없는 이곳을 우리는 역시나 C선생님과 집주인 회장님의 친분(!)으로 구경이 가능했던 것인데.... 아오... 다들 돈 많이 벌면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서울 땅에다가 이런 집 짓고 살고 싶다고 한탄들을 했다. 어찌나 아담하고 예쁘고 쓸모있게 잘 지어놨는지 원...
위 사진은 대문을 들어가 연못이 있는 아랫마당에서 올려다본 전경이다.
서울시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별서'는 이 한옥 전체가 아니고, 안쪽에 벽돌로 지은 바로 이 건물.
2층 벽돌집에 한옥을 덧대고 2층 지붕에다 또 다시 누마루를 얹은 이런 구조는 다른 데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 같다. 저 벽돌집을 복원하느라고 집주인 회장님은 중국에서 오래된 벽돌을 구해 실어날랐단다. 그러니깐 저 집도 '청풍양식'이 한옥에 도입된 과도기 한옥집이란 얘기다. 창덕궁 선향재나 경복궁 집옥재처럼...
뒤로 돌아가서 신기한 건물 사진 다시한번 찍어주시고...
오른쪽 사진의 다과는 이번에도 @@창호 회장 사모님이 구경꾼들을 위해 뒤뜰 잔디밭에 마련해놓은 것. C선생님과 친분이 있으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집구경 온 귀찮은 객들한테 매번 가든파티 느낌 물씬나는 다과와 커피, 차를 준비해놓다니... 또 한번 완전 감동했다. 이것이 혹시 그 말로만 듣던 노블리스 오블리쥬인가... 집에 손님이 오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는다는 옛선인들의 접객 법도인가... 그러면서...
창호회사 회장님 답게 한옥집 미닫이문도 이중삼중 확실하게 난방에 힘썼고 방충망도 색 고운 삼베로 만들어놓아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다 그림의 떡이다 떡... 그러고 마당을 돌아섰더니 실제로 맛있는 '떡'이 저렇게 기다리고 있질 않겠나. ㅎㅎ
제대로 베풀며 산다면 부자로 사는 것도 욕먹을 일만은 아니겠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느꼈다. 재벌이랑 부자는 무조건 미워하고 보는 내가 비뚤어진 거지.. 흠... 그나저나 돈을 얼마나 벌어야 저런 한옥을 짓고 살 수 있을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