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미드나잇

놀잇감 2013. 7. 3. 10:15

<비포 미드나잇>을 보기 전에 DVD로 사둔 시리즈 전편을 복습하고 가야지 마음 먹었었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그랬겠지만, 이 시리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정말로 오래 만나지는 못했지만 문득 궁금해하고 간혹 떠올리는 친구와도 유사했다.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나이들어 가는 묘한 기분을 주는 이런 영화 속 인물들이 또 있을라고. 

 

암튼 내가 기대했던 대로 제시는 <비포 선셋>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비행기를 놓쳤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이미 <비포 미드나잇>에 후한 점수를 줄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 보는 내내 킬킬거리며,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중년 커플의 대화에 공감은 하면서도 영화관을 나서는 마음 한 켠이 씁쓸하고 서글펐다. 적당히 낭만적이고 좀 더 아련하게 그려냈을 수도 있는데 너무 현실적이기만 한 거 아니냐고! ㅋㅋ

 

 

 

전편들처럼 비엔나와 파리의 아름다운 장소와 풍경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펼쳐지길 기대했는데 그리스라는 배경이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던 점도 내겐 불만이었던 것 같다. 작은 성당과 그리로 가는 길과 바닷가 카페의 노을 장면은 좋았지만... 그 역시 뭔가 부족한 느낌. 딸 쌍둥이을 키우며 여름휴가 온 커플의 대화에서 뭘 얼마나 더 바라겠느냐마는, 그래도 전직 환경운동가인 여자와 소설가 남편 사이에선 여전히 전편처럼 '주옥' 같은 대화들이 간간이 오갈 것이라 기대했다가 속사포처럼 오가는 건 그냥 상대에 대한 빈정거림과 실망과 구차한 현실에 대한 자각뿐이란 게 아쉬웠다. 현실이 그렇지 뭐, 하면서도 둘에 대한 환상과 낭만은 버리기 싫었던 모양이다. 전편에서 셀린이라는 인물이 참 매력적이긴 해도, 같이 살긴 심히 골치아픈 인물일 거라는 예상은 이미 했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며 이상주의자이자 활동가이긴 참 어려운 법인데, 거기다 작가의 아내이자 쌍둥이의 엄마라고? 분명 접어주고 가야하는 조건이 한둘이 아님에도, 아줌마 셀린과 추레한 제시의 모습이 내 눈에 퍽이나 실망스러웠던 건 순전히 로맨스에 대한 내 욕심일 수도 있다. 그래도 섭섭한 건 섭섭한 거지... ㅎㅎ

 

18년 전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나와선 혼자 속으로 장담했었다. 셀린과 제시는 분명 6개월 뒤에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차라리 다시 안 만나고 덮어둔 채 그리워만 하는 만남도 있는 법이다, 뭐 그랬던 것 같다. 피천득의 아사코도 막 대입시키면서. 9년 전 <비포 선셋>을 보며 내 짐작이 맞았구나 괜스레 흐뭇했고, 파리 재회 후 둘의 마지막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해피엔딩을 상상했다. 제시가 유부남이든 아니든 둘은 다시 만나야한다고. 반드시 비행기는 놓치고 말 거라고. <비포 미드나잇>이 정말로 이 시리즈의 마지막일지, 뭔가 또 다른 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또 상상해보자면, 둘이 그렇게 지지고 볶고 싸워대면서 계속해서 나란히 잘 늙어갈 것 같다. 약간 신경질적인 셀린의 성격이야 평생 안 변할테고, 제시의 가정을 깨뜨렸다는 자격지심도 아마 평생 갈 테고, 좋은 엄마가 되려는 노력은 늙을 때까지 변함없을 거다. 그러면서 간간이 쌈닭처럼 제시한테 극단적인 언사를 일삼아 싸움을 걸겠지만, 제시가 또 특유의 말재간과 유머로 풀어주겠지...

 

다만 제시가 번드르르한 말만 앞세우진 않길 바란다. 휴가지에서의 짧은 몇몇 장면만으로도 마초 가장의 낌새를 눈치챘다면 내가 좀 오버하는 걸까? 초대받아 떠난 여행의 휴가지에서도  셀린은 부엌에서 요리하던데, 제시는 남자들과 밖에서 수다나 떨고 말이지! +_+ 또한 제시의 지적처럼 나도 셀린이 아이들에게만 너무 헌신하지 않으면 좋겠고, 작곡과 기타와 노래를 꼭 다시 즐기면 좋겠고, 둘이 젊어서 그랬듯 대화다운 대화도 좀 나누고 살면 좋겠다. 다행히도 쌍둥이들이 엄마 손탈 나이는 이제 다 지나 학교가게 생겼더라. ^^;; 제시는 아들 헨리의 성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고 방학때만 만나는 걸 안타까워하지만, 영화 초반부에 얼핏 그려진 헨리의 모습과 언행으로는 대단히 잘 컸으니 걱정 안해도 될 듯. 열네 살이면 딱 나의 큰조카 나이인데, 이혼한 아버지의 애인(부인?)과 이복동생들 따라 그리스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뒤 홀로 미국으로 돌아가며 아빠에게 최고의 여름 휴가였다고 말해주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닐 거다. ㅋㅋㅋ 영화 이후 주인공들의 삶에 대해서 또 이렇게 시시콜콜 내가 염려하고 예상한다는 것도 좀 웃기지만, 이런 마음이 드는 걸 어쩌겠나. 심한 권태기와 갈등을 겪고 있는 친구 부부의 하소연을 짜증과 한숨 속에 듣다가, 불행하면 헤어져! 라고 조언하기엔 둘의 사랑이 여전히 꽤나 깊음을 깨닫고 둘이 잘 헤쳐나가겠구나 싶어 그냥 입을 다무는 느낌이랄까...

 

째뜬, <비포 미드나잇>을 보고 몹시도 찝찝하고 서운한 마음에 오래도록 후기를 못 쓰다가, 뒷북으로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다시 보고나서야 뭔가 개운해졌다. <비포 미드나잇>을 만들어줘서 고맙고, 영화를 본 것도 좋았지만 기분 좋은 여운은 <비포 선셋>이 역시 최고였던 걸로.   

 

비포 선라이즈

 

아 참, <비포 미드나잇>에서 셀린이 입고 나오는 저 끈 원피스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스물 세살 셀린이 입은 옷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처음 만났을 땐 안에 반팔 티셔츠 받쳐입고 있었는데, 같이 밤을 보내고 난 새벽엔 끈 원피스만 입고 다닌다.. ㅋ

 

앞 시리즈 두 편에선 두 주인공이 걸어다니는 장면이 많아 특히 좋았는데, 마음에 꼭 드는 사진을 잘 못찾겠다. 이상하게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둘 다 제일 어렸을 때가 분명 리즈 시절일텐데, 나는 <비포 선셋>의 모습이 둘 다 제일 좋다. 서른 즈음에서 통 안늙으면 좋겠고, 정신적 성장도 멈춰버린 나의 심정이 반영된 때문일까? ㅋㅋㅋ

 

 

그런 의미에서 셀린의 기타연주 장면 퍼왔다. 줄리 델피가 직접 만든 노래라지 아마. 이렇게 예쁘고 재주 많은 셀린이 9년만에 확 늙어버렸다는 게 정말... ㅠ.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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